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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77

[역사/절기] 속절에서 명절로 체급을 키운, 추석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아래와 같이 총 8번의 시험을 치러, 문과 최종합격자 33명(무과 28명 별도)을 선발했다. 소과 : 초시·복시대과초시 : 초장·중장·종장대과시 : 초장·중장·종장 이후 33명은 국왕 앞에서 전시(殿試, 마지막 논술시험)를 치렀다. 전시에서 임금이 당시의 정치적 현안에 대해 출제한 문제를 >책문(策問)이라고 하며, 최종합격자들이 책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작성한 답안을 >대책(對策)이라고 한다. 오늘날 대책은 어떤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계획·방법·문제해결수단을 의미한다. 전시가 중요했던 이유는 그 결과에 따라 등수가 정해졌기 때문이다. 이이가 치른 책문에 명절·속절의 구분에 관한 내용이 나타난다. 이이의 절서책에서는 중국성인의 고제(古制)에 맞지 않는 명절을 속절(俗節)로 보아야 하.. 2025. 10. 4.
[역사/신라] 신라를 상징하는 떡, 송편 삼국사기에 따르면, 유리이사금(신라 제3대, 재위 24~57년)시대 왕경(현 경주) 6부 여인들을 2팀으로 나누어, 음력 7월15일(백중)부터 8월15일(가윗날)까지 1달간 베짜기(길쌈)를 경쟁시킨 뒤 생산량에 따라 승패를 가렸다. 패자는 승자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면서 슬피 울며 노래를 부른 행사를 가윗날 축제라고 했다. 당시 다음의 왕경 6부는 행정구역을 넘어 신라를 건국한 정치적 지배세력들을 의미했기에, 가윗날 축제는 신라가 부족국가에서 고대국가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부족들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방편으로 시행되었다. 탁부본피부한기부사탁부잠탁부사피부 지배층들이 참가한 행사인 만큼, 왠지 김쌈에서 졌다고 슬피 울었다는 것은 다소 은유적 표현으로 느껴진다. 아마 행사참여자들이 승패를 떠나 뒷풀이를 하면서 1.. 2025. 10. 4.
[역사/서울] 왕십리 옆 무당마을, 신당리 조선시대 왕십리는 광희문 바깥의 넓은 지역으로, 한성부 성저십리에 속했다. 고려시대 남경 동촌에 위치했던 왕심리(旺心里·往十里)가 17세기 이후 왕십리로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왕십리(往十里, 십리를 더 간다)는 조선 초기의 설화와 송별풍습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9세기까지 현재의 신당동·황학동·무학동·흥인동 일대는 행정적으로 왕십리계(往十里契)에 편입되어 있었다. 조선 건국 후 새도읍의 터를 찾던 무학대사는 오늘날의 왕십리 인근에서 소를 타고 지나던 노인을 만났고, 그 노인이 십리를 더 걸으면 좋은 터가 있다고 알려 줬다고 한다. 근데 훗날 무학대사가 초상화를 통해 자신이 만났던 노인이 도선대사임을 깨달았다는 설도 있는데, 오늘날 도선동(道詵洞)이 유래된 배경이다.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 2025. 9. 18.
[역사] 지정학이 좌우했던, 해외여행 오늘날 한국인들은 해외여행을 국내여행 만큼이나 수월하게 갈 수 있지만, 1980년대만 하더라도 그러지 못했다. 1983년 관광여권이 조건부로 발급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점차 제한이 완화다가 1989년 1월 해외여행이 전면적으로 자유화되었다. 서울올림픽를 치른 지 3달 만이다. 그 전까지 정부는 국가발전에 유익한 목적(유학·출장·노동이주 등)에 한해서만 해외여행을 허가했는데, 일반관광 목적의 해외여행을 규제했었던 이유가 복합적이었다. 열악한 경제환경 속에서 외환보유고가 부족했기에, 관광(해외소비)를 통한 외화유출을 방지하고자 했었다. 또한 냉전시기였던 만큼 적국(북한)과의 접촉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었기에, 해외로 나가는 이들은 반공·방첩 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렇듯 과거에는 지정학적 위치와 국제정세가 해외.. 2025.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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