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다음 말이 합쳐진 순우리말로, 경제적 동일성을 갖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신시
울타리
신시(神市)는 단군시대의 시장(市場)으로, 경제적·정치적 중심부였다. 신시시대에는 화폐가 없었기에, 자급자족이 커버할 수준의 경제단위(지역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각 지방(부족)을 통치하는 호족이 국가를 형성하는 세력단위였고, 점차 >부족국가를 거쳐 부족연합국가로 발전했다. 민족은 신념적·정신적·문화적·혈통적 단일체제를 갖춘 부족연합국가를 의미한다.
오늘날의 서울은 삼국시대부터 지정학적 요충지였다. 초기 백제가 수도로 삼았고, 고구려 중흥기에는 남평양으로 불리었다. 이전 글 <오래 전 글로 피어난, 파주>에서는 17세기 조선시대 파주(당시 교하) 천도설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광해군시대에 왜란·모반이 잇달아 일어난 이유를 한양의 쇠한 지기로 보았고, 광해군도 교하천도를 통해 왕권강화를 도모했다. 교하 갈현리은 장릉(인조 능)을 조성할 당시 길지로 평가받았다고 한다.
백제 시절 강남, 위례성
백제가 한강에 자리 잡을 당시, 한강 북부는 곡창지대에 둘러 쌓인 군사요새였다. BC 18년 남하한 온조왕이 위례성 주변을 수도로 하여 십제(十濟, 10명의 도움)를 건국했는데, 이는 10명의 신하와 함께 건국하여 지어진 국호였다. 제(濟, 건널)는 물을 건너는 의미에서 유래했지만, 돕거나 구한다는 확장적 의미로도 사용된다. 비류(온조 형)은 미추홀(현 인천)에 자리 잡았지만, 정착에 실패하면서 십제에 귀속된다. 이렇게 백성이 크게 증가한 십제는 국호를 백제(百濟, 100개의 가문)로 변경하게 되는데, 이는 많은 백성을 가졌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수서(隋書, 중국사서)에서는 백가(百家, 많은 부족)가 바다를 건너(濟) 왔기에, 백제라 불렀다고도 적고 있다.
하남 위례성(慰禮城, 한성백제)은 건국시점부터 475년까지 백제의 도읍지였으며, 현재 서울 풍납토성·몽촌토성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여기서 하남(河南)은 오늘날의 행정구역이 아닌, 한수(漢水, 한강)의 남쪽이라는 전통적 의미를 가진다. 북한산성 근처에 북위례성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고구려 시절 강북, 남평양
427년(장수왕 15) 고구려는 평양(기존 국내성)으로 천도했는데, 삼한통일을 위한 남진정책의 일환이었다. 한강까지 남진한 장수왕은 북한산군(北漢山郡)을 차지한 후, 이 곳에 남평양(南平壤)을 설치했다. 이후 백제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2번의 천도를 했다.
475년(웅진, 현 공주) : 장수왕(고구려)의 한성 함락
538년(사비, 현 부여) : 성왕이 국력의 확장 의지
장수왕은 79년(412~491) 간 재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향년 97세였다고 한다. 하지만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결과적으로 고구려의 멸망을 가져왔는데, 대륙에 대한 방어를 등한시한 나머지 나당연합군에게 침략을 당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말 수도 후보, 용인
일본제국주의 입장에서 강점기는 한반도를 발전시킨 시기로 인식했으며, 궁극적으로 일본인들을 이주·거주시킬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인은 반강제적으로 만주·연해주로 이주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1943년 일본 각의에서 결의한 중앙계획소안(中央計劃素案, 일본 비밀국토계획)에서는 대동아권의 제국수도 후보지로 다음 3곳을 정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경성부 남쪽 교외
일본 오카야마
일본 후쿠오카
각의는 비밀국토계획 결의 직후, 관련서류를 소각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한다. 그 만큼 비밀리에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각의(閣意)는 내각(內閣, 행정 담당기관)은 일본의 행정을 담당하는 기관의 의사를 결정하는 합의체로, 내각총리대신·국무대신으로 구성된다. 각(閣, 집)은 의원내각제에서 행정권 행사를 위해 거쳐야 할 의결절차(회의)를 의미하며, 대통령제의 국무회의와 비슷한 성격이다.
당시 조선의 수도 후보지는 용인 인근으로, 한국외국어대 용인캠퍼스가 위치한 계곡 일대라고 알려져 있다. 조선을 제국수도로 염두했던 이유는 지진이 없기 때문이다. 비밀계획에서는 인구배정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일본인 800만명과 조선인 200만명을 만주로 이주시키고, 일본인 200만명을 한반도로 이주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마 이주계획이 실행되었다면, 더 많은 조선인들을 춥고 척박한 만주로 이주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부산은 한국전쟁 중 임시수도였으나, 도시확장이 어렵다는 지리적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한강지형으로 북한방어가 수월하고 도시확장이 가능한 서울 근교의 평지들이 천도 후보지로 거론되었다. 휴전 직후 이승만 정부는 부평·부천 일대로 천도하려고 했으나, 예산부족과 북한방어상의 한계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박정희 정부도 북한방어를 우선순위로 고려하면서, 북한과 거리도 멀고 자연방어물이 많은 강남 내지 충남 일대를 고려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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