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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역사] 산업혁명의 산업, 면직

by Spacewizard 2025.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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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에서의 '산업'은 무엇일까. 흔히들 증기·철강을 떠올리겠지만, 사실 면직산업이다. 1987년 초딩 시절 일요일 아침에 마르코 폴로의 모험(일본 NHK 애니메이션)에서 흘러 나오던 중독성 있는 화음이 가끔 기억이 난다. 마르코~ 폴~로~. 1270년 전후 마르코 폴로는 베네치아를 출발하여 중앙아시아를 거쳐 샨두(원나라)를 여행했는데,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상에 대한 설명(훗날 동방견문록)을 썼다. 마르코 폴로는 다음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섬세하고 아름다운 면직물을 코로만델 해안에서 보았다

코로만델 해안 [출처:위키피디아]

향신료에 이은 최고의 무역품, 면직

 

19세기 이전까지 유럽에서는 가장 최상급 면직물은 인도산이었다. 코로만델(Coromandel)은 인도 동부의 남북으로 길게 뻗은 해안지역으로, 바니아(Bania, 인도 현지무역상)을 통해 내륙의 면직물 물량을 확보했다. 물량확보는 하도급으로 이뤄졌다. 무역선이 도착하기 6개월 전에 영국상인들은 바니아와 도급계약을 맺고, 원하는 물량·가격·디자인·배송일자를 상세하게 주문했다. 바니아들은 다시 여러 중개인들과 하도급계약을 맺었고, 하도급업자들이 인도내륙 곳곳을 돌면서 농민·방직공과 계약을 맺었다.

 

17세기 전반 영국·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열도에서 향신료 전쟁을 벌였는데, 이 향신료 전쟁에서 패배한 영국은 면화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영국 내에서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네덜란드인들이 영국의 여러 도시에서 면직물을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인도산에 비해 품질이 한참 떨어졌었다. 1621년 영국 동인도회사는 5,000필 가량의 인도산 면직물을 수입했고, 유럽으로의 수출물량 증가는 인도산 면직물 가격·생산량 증가를 가져왔다. 인도는 수 세기 동안 고수해 온 생산방식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산량을 증가시키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영국은 이 틈을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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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혁신의 요람, 보호무역

 

17세기 후반 영국정부는 면직물 생산방식의 혁식을 도모하기 위해 보호무역을 단행했다, 1685년 인도산 면직물에 관세 10%를 부과했고, 5년 후인 1690년에는 관세를 20%로 올렸다. 1701년 염색 면직물 수입을 금지했고, 1721년에는 인도산 캘리코의 착용을 금지했다. 18세기 영국은 식민지 무역의 확장으로 국부를 쌓아 갔지만, 문제는 상품공급이 자본축적을 따라가지 못하는 만성적인 초과수요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영국은 생산량을 향상시키기 위해 기존의 수공업 방식을 변화시켜야 했고, 그 노력의 결과가 산업혁명이다.

 

보호무역 장벽 안에서 영국의 직물업자들은 생산방식의 혁신을 시도했고, 마침 1784년 맨체스터 교외에 수력방적기를 이용한 방직공장이 설립되었다. 이 공장에서의 기술적 혁신이 산업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1790년 수력방적기는 수작업 대비 50배 가량의 생산성을 갖췄고, 이후 1825년 수력방적기가 자동화되면서 생산성은 370배 가량으로 증가했다. 결국 영국의 생산비용은 인도보다 낮아졌고, 1830년 후반 인도는 영국산 면직물을 수입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영국본토에는 면화 재배지가 없었기에 원료 공급처를 찾아야 했다. 당시 식민지(인도)가 면화를 가장 많이 생산하고 있었지만, 방직산업이 컸던 만큼 면화를 수출하기는 어려웠다.

 

동양스런 영국멋, 캘리코

 

캘리코(Calico)캘리컷(Calicut, 인도 남서부)에서 사용하는 목면(면화실로 짠 옷감)으로, 현지에서는 캘리언(cāliyan)이라 불렀다. 무늬가 없는 거칠고 튼튼한 면직물을 의미했으나, 이후 다양한 프린트 무늬가 들어간 직물을 포함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캘리코는 가벼우면서 다양한 색채를 가지고 있었다. 1500년대 포르투갈인들이 인도와의 무역을 통해 캘리코(캘리컷제 천)을 유럽에 수출했다. 원래 신사의 나라 영국은 양털로 만든 모직물을 잘 만들었으나, 문제는 모직물의 색상·중량이었다. 어둡고 무거운 모직물에 비해, 면직물은 가볍고 색채가 다양했다.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값싼 캘리코를 대량으로 수입했고, 값싼 인도산 캘리코는 가구용(식탁보·침대보·커튼 등)으로 사용했다. 1660년대 왕정복고 시대에 접어 들면서, 영국 왕실에서 캘리코 의복을 입기 시작하면서 영국사회 전반으로 캘리코가 유행하게 된다. 이후 최대 동방무역품이 향신료에서 캘리코로 바뀌게 된다. 특히 친츠의 인기가 좋았는데, 이는 밝은 색상에 다채로운 무늬(주로 꽃무늬)가 들어 있었다. 영국 여성 뿐만 아니라 신사들도 밝고 가벼운 친츠를 즐겨 입었다. 친츠(Chintz)는 산스크리트어 치트라(Chitra, 얼룩덜룩하거나 빛나는 것)에서 유래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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