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동래에 상륙한 후, 20일 만에 한양에 도달했다. 왜군은 침공 전부터 조사원을 파견하여 조선에 대한 정보(도로 사정, 하천 수위, 나루터·성 위치 등)을 파악했고, 이러한 정보를 통해 속도전(20km/일 행군)을 펼칠 수 있었다. 나고야성의 건설과 동시에 상륙지·집결지·행군로 작전계획가 이뤄졌고, 9개 군단이 이 계획을 실행했다. 사전정찰을 통해 조선의 관도체계를 파악한 후, 다음 3개의 진격로로 분산진군했다.
남동로(南東路, 제1군 고니스 유키나가) : 동래-청도-대구-선산-상주-조령(鳥嶺)-충주-여주-한양
동로(東路, 제2군 기타 기요마사) : 울산-경주-죽령(竹嶺)-원주-여주-한양
서로(西路,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 ): 김해-성주-김천-추풍령(追風嶺)-청주-한양
조선시대 국도, 5개
또한 왜군은 산악지대를 우회하기 보다는 고개(조령·죽령·추풍령 등)를 넘으면서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오조관도(五曹官道)는 조선시대 한성에서 5개의 방향으로 연결된 국도체계(총 연장 800km 가량)로, 위에 포함되지 않은 2개의 관도는 다음과 같다.
남로(南路) : 한양-수원-공주-전주-남원
북로(北路) : 한양-의주
관도는 폭 4~6m 포장도로로 병마행군에 최적화되어 있었으며, 역참·나루터가 배치되어 보급이 용이했다. 경국대전 기준으로 25리마다 1참(역참), 50리마다 1원(역원)을 두었고, 승여사(병조 산하)에서 총괄하면서 지방에 찰방·역승·역장·역리 등을 파견했다. 역마·역전(역에 속한 토지)으로 재정을 충당했습니다. 찰방(察訪, 살피는 찾다)은 각 도의 역참을 관장하며 역마·사신접대·통행·통신을 총괄하는 외관직(종6품)으로, 역행정의 최고책임자였다. 조선 초기에는 역승(驛丞)·정역찰방이 함께 설치되었으나, 1535년(중종 30) 찰방체제로 전환되었다. 양재역(良才驛)은 한강 이남 최대 역참이었으며, 남부지방으로 가는 관원·사신이 반드시 거치던 공간이었다.
3일 천하, 흥안군
인조반정으로부터 11개월이 지난 1624년(인조 2) 이괄이 영변에서 난을 일으켰는데, 인조의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이 원인이었다. 이괄은 반정모의에 늦게 합류했다는 이유로 2등 공신으로 책봉된 반면, 모의누설 소문에 두려웠던 나머지 집 나서도 주저했던 김류는 1등 공신이 되었다. 인조는 이괄을 평안도 병사로 임명하면서 위로를 표했지만, 쫒겨난다고 여겼던 이괄은 가슴에 칼을 품게 된다. 1624년 1월 이전(이괄 아들)이 역모를 꾀했다는 첩보가 올라왔다. 이귀(1등 공신)이 이괄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괄을 신뢰한 인조는 이전만 조사하라고 명한다. 하지만 이괄은 아들을 체포하러 온 금부도사를 죽이고, 사적인 복수 차원에서 명분 없는 반란을 일으켰다. 이 때 반란의 선봉에는 항왜(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투항한 왜군)이었다.
2월 8일 반군이 벽제(파주)까지 진군하자, 인조는 수원을 거쳐 공주로 피신했다. 피난하기 전에 김류는 후환세력(대북파·반정불만세력) 반란연루자라고 주장했고, 이귀의 반대에도 인조는 숙청(37명 가량)을 승인했다. 반란의 불똥이 엉뚱한게 튄 것이었는데, 반정으로 권력을 쥔 이들도 항상 반란이 두려웠을 것이다. 아는 놈이 더하고, 때린 놈이 발 뻗고 못자는 법이다.
반군은 선조의 10번째 아들(서자)을 천립했는데, 바로 흥안군(興安君, 이제)이다. 조선 역사상 가장 짧은 3일 왕조의 주상으로 추대되었다가 처형되면서, 권력 틈의 희생양으로 여겨지고 있다. 공주 피난 도중에 도주한 흥안군은 반군진영에 합류했고, 2월 11일 한성 입성 후 이괄이 왕으로 추대했다. 이 때 경복궁 옛터에서 논공행상을 시도하기도 했으니, 반군은 자기 세상이 온 듯 여겼던 듯하다. 2월 11일 한성백성들은 성 위에서 무악재에서 대치한 반군·관군을 구경했으며, 결국 반군은 증원된 관군에게 패하게 된다. 흥안군은 소천(昭川, 현 경기도 광주시 소천면)으로 도주했으나, 체포되어 한성으로 압송된다. 2월 14일 심기원(도원수)은 장만과 상의 후에 돈화문(창덕궁) 앞에서 즉결 처형(교살·효수)했다.
말죽거리의 기원, 팥죽
반군세력을 피해 피난 중이던 인조는 양재역에 도달할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하다가, 한 유생이 올린 팥죽을 말 위에서 마셨다고 한다. 양재역 부근이 말죽거리로 불리게 된 유력한 설 중 하나이다. 수원에 도착한 인조는 반군의 항왜에 맞서기 위해 일본원병을 통해 난을 진압하자는 제안을 일시적으로 수용했으나, 외교적 파장을 우려한 청회사(靑寮使, 청나라 사신)의 만류로 취소된다. 천안에 도착한 인조는 양재역에서 팥죽을 진상한 유생을 금부도사로 임명했는데, 죽 한 그룻에 서슬푸른 금부도사라. 1709년(숙종 35) 공산성(공주산성)에 쌍수(雙樹)정비가 세워졌는데, 비석에는 인조가 이괄의 난 당시 쉬어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통상적인 사법은 형조의 담당이었지만, 의금부(義禁府)는 국왕 직속의 사법·공안기구였다. 금부(禁府)·금오(金吾)로도 불린 의금부는 모반·난언·강상죄를 전담했다. 금부도사(禁府都事)는 의금부에서 근무하던 관원으로, 도사(都事)는 정5품~종6품의 품계를 말한다. 금부도사는 왕명에 따라 중대범죄의 수사·심문·처형 집행을 담당했는데, 하급관리(나장·군사 등)를 거느리며 은밀히 활동했다. 처형 과정에서 사약을 전달하는 역할을 금부도사가 했다.
이후 이괄은 광희문(시구문)을 통해 도주했는데, 훗날 병자호란 당시 인조도 광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피난갔다. 이괄은 도주 중에 부하들의 배신으로 목이 잘리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반란이 진압된 상황에서도 인조는 신하들과 산성수배대책을 논의했다고 한다. 인조는 이괄을 배신한 부하에게 벼슬(6품)을 내렸고, 공주선비들을 위무하기 위해 특별 과거시험을 개최했다. 하지만 공주 출신의 합격자가 없자, 인조는 강윤영을 추가선발했다.
1708년(숙종 34) 쌍수정사적비(雙樹亭史蹟碑)이 세워졌는데, 여기에는 인조 일행이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 머물렀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신흠(우의정)이 찬(撰)하고, 남구만(중추부사)가 서(書)했다. 최석정(영의정)이 전(篆)하고, 송시열의 글이 음기(陰記)되었다. 조선시대 금석문 체계는 다음과 같았다.
찬(撰) : 문안(행장·공적·사건경위 등)을 작성한 사람
서(書) : 찬자의 원고를 비문으로 옮겨 씀
전(篆) : 제목·핵심문구를 전서체로 씀
음기(陰記, 숨겨진 기록) : 비석의 뒷면·측면·지하에 새긴 보조기록
음기에는 본문에 담지 못한 실무정보(시주자·관직·연호·공사 경위 등)와 임금교서, 왕사·고승의 표문, 후대의 추기(追記) 등을 병기한다. 비가 건립되기 40년 전인 1668년, 송시열은 충청도 관찰사의 부탁으로 음기내용을 작성했다. 음기에는 이괄을 잘못 대우한 인조의 잘못으로 정묘호란·병자호란이 터졌다고 기록되었는데, 죽은 임금의 과를 과감하게 드러낸 송시열의 위세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괄의 난 당시 송시열은 17세에 불과했지만, 훗날 이괄의 공훈책정 분만을 이해하려는 입장이었다. 소인 내부의 공신층 부패를 비난하면서, 서인 내부개혁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전 글 <조선내내 왕가의 공간, 서울공예박물관 터>에서는 1623년 즉위한 인조가 정명공주(인목대비 딸)를 혼인시키면서 혜순옹주의 집을 하사했으나, 그 집이 이괄의 난으로 훼손되었다고 언급했었다. 그리고 이전 글 <조선의 계엄사령관, 도체찰사>에서는 이원익은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당시에도 도체찰사로 임명되면서, 왜란에 이어 호란 와중에도 나라를 수습했다고 언급했었다. 또한 이전 글 <의문의 패배자, 인조>에서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조정은 반란군의 명분이 될 수 있는 광해군을 태안으로 옮겼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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