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역에서 1번 출구로 나오게 되면 안국빌딩이 위치하는데, 안국동사거리에서 북쪽으로 뻗은 율곡로 3길(감고당길)은 예전부터 운치를 즐길 수 있는 여유로운 공간이라 자주 즐겨찾는다. 감고당길 초입의 오른편에는 10여년 전에는 풍문여고가 있었고 왼쪽에는 약 4m 높이의 담장이 서있었지만, 지금은 두 곳 모두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변신했다. 우선 오른편의 풍문여고 자리는 학교건물 5개를 리모델링 한 후, 2021년 11월 29일 서울공예박물관이 개장했다. 왼쪽 담장도 2022년 10월 7일 열린송현 녹지광장이 개방되면서 1.2m 높이의 돌담으로 낮아졌다.

세종이 막내아들에게 선물한, 동별궁
1434년(세종 16)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8남 영응대군은 세종으로부터 매우 큰 사랑을 받았다. 다른 왕자들은 아버지 세종을 진상(進上)이라 부른 것과는 달리, 영응대군은 15살까지 세종을 편하게 부르며 항상 곁에서 식사를 하였다. 세종을 영응대군에게 내리기 위해 일찍이 안국방동에 위치한 이교의 집을 사두었는데, 1445년(세종 27) 4월 영응대군이 여산 송씨와 혼인하게 된다.
당시 김종서는 "이교의 집터는 여염 사이에 있고, 땅도 또한 기울고 좁으며, 또 저자와 가까워서 시끄럽고 고요하지 못하오니"라면서 대군의 집터로는 부적합하다는 주장을 펼쳤으나, 결국 세종의 뜻에 따라 안국방동에 집터를 정하고 인가 60여구를 헐었다. 또한 세종은 전용면적을 확장하기 위해 대들보 길이를 8자에서 10자로 늘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1449년(세종 31) 봄부터 짓기 시작하여 그 해 11월에 완성된 이 집은 동별궁(東別宮)이라 불렸다. 하지만 집이 완성된 해에 세종은 질병을 이유로 며느리 송씨를 내쫒았다.

세종이 일찍이 내탕고의 진귀한 보물을 영응대군에게 모두 주려했다가, 이를 하지 못하고 승하한다. 하지만 즉위한 문종이 내탕고의 보물을 영응대군의 집으로 보냈다고 하니, <재벌집 막내아들> 마냥 재력이 막강한 왕가 막내아들이었다. 문종·세조는 동생들을 잘 대해줬는데, 특히 세조는 영응대군의 집을 수차례 들러 연회를 베풀었으며, 영응대군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음식을 들지 않을 정도로 슬퍼했다고 한다.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에게 영응대군은 든든한 쿠데타 자금지원책이었을 것이며, 단종 즉위 후 수양대군은 영응대군과 부인 송씨와의 재결합 문제를 해결해줌으로써 영응대군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을 수도 있다. 세종이 죽은 후 수양대군은 대군 2명(임영대군·영응대군)과 큰아버지 양녕대군의 지지를 받으며 종친세력을 형성했다.
1450년 세종은 완공 후 1년된 동별궁에서 승하한다. 세종은 잦은 병치레와 자녀요절 등으로 경복궁 풍수설의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따라 말년의 세종은 경복궁을 기피하여 아들·사위·형제 등의 집으로 거처를 자주 옮겼는데, 동별궁을 지을 당시 부지 내 동쪽에 거처하기 위해 만든 작은 궁에서 눈을 감았던 것이다. 세종의 빈소로 삼았던 동별궁에서 문종의 즉위식도 거행되었다. 당시 동별궁은 한성 내의 신축저택 중에서도 단연 핫플레이스였음이 분명하다. 약 4개월 만에 장례를 치른 후, 세종의 후궁들은 자수궁으로 옮겼다. 영응대군은 3명의 부인을 두었지만, 아들이 없어서 동별궁은 첫째 부인 송씨의 거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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