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駙馬)는 황제(내지 임금)의 사위에게 주던 칭호로, 황제의 수레를 호위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전한 한무제가 설치한 부마도위(駙馬都尉)는 황제행차에서 부마를 관리하는 호위관(고위직)이었다. 부마는 실제 탑승수레를 위장하기 위해 운용한 부거(副車, 예비수레)를 끄는 말로, 점차 황실 내부인물이나 유력외척에게 주어지는 명예직 성격으로 변해갔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秦)은 15년 만에 멸망하긴 했으나, 훗날 전한이 안정화된 왕조를 구축한 기틀을 마련했다. 전한(前漢)은 진한(秦漢)의 초기로, 진의 가혹한 법률을 완화한 약법삼장(約法三章)으로 민심을 얻었다.
하안(何晏, 위나라 학자)이 금향공주와 혼인하며 부마도위에 제수되었는데, 이 때부터 황제의 사위와 연결된 것으로 전해진다. 서진을 거치면서 황녀와 혼인한 자에게 관례적으로 부마도위를 주면서, 실질적인 관직이라기 보다는 칭호·명예직의 성격이 강해졌다. 위진(魏晉)은 위나라와 진나라를 합친 말로, 위나라가 사마 가문에 의해 진나라로 교체된 시기이다. 220년 조치(조조 후예)가 후한을 찬탈하며 위나라를 건국했으나, 45년 후인 265년 사마염(사마소 아들)이 위나라 왕위를 계승하여 통일왕조(서진)를 건국한다. 영가의 난으로 북중국을 상실한 서진은 양쯔강 유역으로 남하한 후 동진이 되었다. 위진남북조 이후 당·송·명·청에 이르기까지 부마의 호칭은 이어졌고, 품계·녹봉은 황녀의 격(공주·옹주)에 따라 정해졌다. 청대에는 액부(額駙)라고 부르기도 했다.
도굴꾼의 임기응변, 부마
황제의 사위에게 부마도위를 내린 것과 관련하여, 무덤 도굴과 연관된 귀신 이야기도 있다. 진(秦)나라 신도탁은 스승을 찾아 옹주로 향하던 도중 어느 저택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는데, 그 곳에서 자신을 공주라고 소개한 여성과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3일 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 공주는 스스로를 귀신이라 밝히면서 더 이상 인연은 화를 초래할 것이라 했다. 신도탁은 공주가 건네 준 금실로 짠 베개를 들고 대문을 나서자 마자, 집은 사라졌고 허허벌판에 무덤 하나만 있었다. 그리고 무덤 속의 공주시신은 옷이 벗겨진 채였다.
이후 신도탁은 금실베개를 판 돈으로 시장에서 음식을 사 먹었는데, 지나가던 왕비가 그 베개를 발견했다. 왕비는 금실베개를 판 청년을 잡아오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사실 그 금침베개는 죽은 공주의 부장품으로 무덤에 넣어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신도탁은 도굴 혐의로 잡혀 왔고, 베개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왕과 왕비는 신도탁이 죽은 딸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고 생각하여, 부마도위라는 벼슬에 임명했다. 이 이야기는 도굴꾼이 스스로의 범죄행위를 숨기기 위해 지어낸 변명일 가능성이 높다. 공주시신은 도굴꾼이 시신에 달린 부장물을 빼는 과정에서 흐트러졌을텐데, 이는 마치 공주와 정을 나눈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허수아비 간택, 조선시대 부마
한반도에서는 고구려 이후 왕의 사위를 통칭하는 말이 되었다. 조선 태종대 부마간택이 제도적으로 정비되었고, 공신과 함께 이성제군부에 속했다. 부마간택은 왕비·세자빈 간택만큼 엄격하고 까다로웠다. 공주의 혼기가 차면 금혼령이 내려지고, 비슷한 나이대의 명문가 자제들은 혼인할 수 없었다. 부마의 평가요소는 능력·야망가 아니었고, 오히려 온화한 성품에다가 정치적 야심이 없어야 했다. 왕실이 필요로 한 사위의 요건은 공주의 안전한 배필이자 왕실의 장식품이 될 만한 인물이었다.
세종대 부마를 의빈(儀賓, 예의를 갖춘 손님)이라 칭하면서 처우가 구체화되었는데, 토지(과전)·녹봉 규정이 마련되었다. 세조대 의빈부(儀賓府)에서 부마 관련 업무를 맡았는데, 부마는 혜택과 함께 규제(재혼금지·관직제한 등)를 받았다. 부마는 공주만을 바라보며 살아야 했기에, 일반적인 양반처럼 축첩을 할 수가 없었다. 공주며느리가 아들을 낳지 못할 경우, 부마 가문은 대가 끊기는 리스크가 있었다. 조선이 부마를 규제한 이유는 외척의 권력남용을 막아서 왕실의 안녕을 지키기 위함이었으나, 부마 개인의 인생만 보자면 우리 속 원숭이였을 듯하다.
사랑받던 공주의 정치개입, 화완
화완옹주(영조 9녀, 영빈이씨)는 사도세자의 여동생으로, 동복언니(화평옹주)가 사망한 후에 영조의 총애를 받은 공주였다. 1749년(영조 25) 정치달(정철 손자)은 화완옹주와 정혼하면서 일성위(日城尉)로 제수된 후 결혼을 했지만, 하나 뿐인 딸이 생후 2년 만에 사망하면서 후사가 끊겼다. 1757년 25세의 정치달이 요절한 후, 1764년 화완옹주는 정후겸(인천어부 아들)을 양자로 삼아서 가계를 잇게 했다.
영조 말기 화완옹주·정후겸은 세손(정조) 대리청정에 반대하면서 정조와 대립했다. 정후겸은 세손궁을 감시하면서 왕위승계를 저지하기 위해 유언비어를 유포하면서 홍국영을 탄핵했다. 정조 즉위 전에는 홍인한·홍상간 등과 결탁하여, 궁궐을 급습하여 정조를 암살하려고도 했다. 1776년(정조 즉위년) 정조는 화완옹주·정후겸의 행위를 반역죄로 다스렸다. 경원부(함경도)로 유배된 정후겸은 삼사의 탄핵으로 가시울타리를 설치되었고, 이후 사사(賜死, 죽음을 하사함, 사약형)되었다. 화완옹주는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용산으로 귀양 후에 사면되었다.
1861년(철종 12) 결혼한 박영효(영혜옹주 남편)는 조선시대 마지막 부마였는데, 영혜옹주는 철종의 동생이다. 결혼한 지 2년 만에 영혜옹주가 죽으면서, 박영효 집안의 대는 끊기게 된다. 1884년 박영효는 갑신정변을 통해 개화정부에서 좌포도대장을 역임했지만, 3일만에 실패했다. 정변 실패 후 주역 9명(김옥균 포함)은 창덕궁 북문을 통해 탈출하여, 인천에서 은신하다가 증기선을 타고 일본으로 신속히 망명했다. 일본에서 9년 이상 머문 박영효는 갑오개혁(1894년)으로 귀국했다가, 다음 해 을미사변으로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여 1907년까지 11년 이상 체류했다. 이후 1925년 사망할 때까지 조선총독부에 협력하면서 친일파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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