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발발하기 5년 전인 1587년(선조 20), 이순신은 함경도 녹둔도에서 여진족 기병 1,000여명의 기습공격을 부상투혼으로 방어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상급자의 왜곡보고로 인해 피해(병졸 11명 사망, 백성 80여명 납치)에 대한 책임을 이순신이 지게 된 상황에서, 이를 보고받은 선조가 재조사를 지시한 것이다. 이후 이순신은 처벌을 면하는 대신 첫 백의종군을 하게 되지만, 이순신의 투혼이 조정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백의종군(白衣從軍)은 벼슬 없이 백의를 입은 채로 군대를 따른다는 의미이다. 백의(白衣, 흰옷)는 벼슬하지 않는 평민을 의미하는 포의(布衣)로, 가장 낮은 병졸의 직분을 말한다. 하지만 백의종군이라 하여 계급강등만을 말하는 것을 아니며, 일선에서 물러나 고문역을 맡는다는 의미도 있었다.
전쟁을 미리 준비했던, 선조
모든 일에는 준비과정이 필요하고, 높은 확률로 정보가 유출되기 마련이다. 임진왜란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일본은 조선에게 정명가도(征明假道, 명을 정벌하기 위해 길을 빌려 달라)를 수 차례 고지했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조선조정은 일본에 통신사까지 보냈다.조정은 통신사(황윤길)의 의견 대신 부사(김성일)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전쟁발생 가능성을 애써 외면했다. 임진왜란을 앞두고도 조선침공에 대한 풍문이 떠돌았는데, 일본상인의 입소문과 요시토시(대마도주)의 제보에 의한 것이었다. 1591년 현소(일본 답례사)가 다음 해에 있을 침략정보를 오억령에게 전해줬지만, 조정은 이를 보고한 오억령을 참수했다. 오랜 평화에 젖은 안전불감증이었다.
하지만 선조의 선견지명이 돋보이는 역사적 장면도 있다. 임진왜란 발발 14개월 전인 1591년 2월,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한 것이다. 당시 3도 6개 수영 중에서 전라좌수영의 기장이 무너져 있는 상태였기에, 선조는 전라좌수사 적임자에 대한 고민이 컸었다.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수사)는 조선시대 각 도의 수군을 절도(節度, 군을 통솔)하는 임무를 맡은 정3품 무관이며, 수영(水營)은 수군절도사가 주재하던 병영이다. 이에 류성룡(좌의정)은 군기잡기에 능한 이순신을 추천했는데, 이순신은 이요신(류성룡 친구)의 동생이었다.
선조도 녹둔도에서 활약한 이순신을 인상깊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종6품(정읍현감)에서 정3품(당상관)까지 7계급을 승진시켜야 한다는 점이었는데, 32세에 무과급제한 이순신은 당시 종6품에 불과했었다. 서인·북인은 이순신의 발탁을 극렬히 반대했고, 사간원도 2차례나 재검토 의견을 올렸다. 결국 선조는 한 단계씩 승진발령을 내면서,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임명했다. 남해를 통솔하던 다음의 수군절도사들은 이순신에 대한 질시·반감이 많았을 것이다.
경상좌수사 : 박홍
경상우수사 : 원균
전라우수사 : 이억기

너무 잘나가도 죽을 운명, 무관
어느 시절 어느 조직이든 파격적으로 잘 나가는 사람들은 조직 내에서 경계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동기가 1년 빨리 진급해도 시기·질투·분노가 차오르지 않던가. 이순신은 엄한 군율과 자상한 배려로 전라좌수영을 빠르게 변화시키면서, 선조의 기대에 부응했다. 실전처럼 연습을 반복함과 동시에,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에 거북선 건조를 완성했다. 이후 이순신은 승전보를 계속 울렸고, 1593년 선조는 삼도수군통제사를 창설하면서 이순신을 초대 통제사로 겸직시켰다.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는 3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 수군 총지휘를 맡은 종2품 관직으로, 통영(統營, 통제사가 있는 진영)이 설치되었다. 여기서 통영(구 충무)이 유래되었다. 이순신은 한산도를 통제영으로 선택하였는데, 이는 내부에서는 선박을 감출 수 있고, 외부에서는 내부를 들려다 볼 수 없으며, 호남으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이었다. 한산도(閑山島) 지명도 처음에는 한(韓)이었으나, 1592년 7월 이순신이 한산도 앞바다에거 왜군을 혁파한 이후에 한(閑, 가로막을·한가할)으로 변경되었다는 설이 있다.
조선은 무인(군인)의 군벌을 우려하여 문인을 우대하였지만, 특수상황(전시 등)에서는 덕망있고 유능한 군인에게 민심이 쏠릴 수 있다. 실제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그러했고, 임진왜란 도중에 이순신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권력자의 시기심에 의해 힘든 고초를 겪어야 했고, 제 명에 죽지 못할 운명이라는 것을 항상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이전 글 <조선의 계엄사령관, 도체찰사>에서도 이순신의 국청장에서 2명을 제외한 200여명이 이순신이 제거되길 기대했을 것이라고 언급했었다. 예나 지금이나 잘 나가는 사람은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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