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부자(父子)관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수직적이고 평화롭지 못한 경우가 많았으니, 이는 역사·도덕시간에서 배웠던 유교적 교리와는 상반되는 현실이었다. 민간 뿐만 아니라 왕가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대표적인 케이스가 다음과 같다.
태종 - 양녕대군
선조 - 광해군
인조 - 소현세자
영조 - 사도세자
정적을 여겨졌던 아들, 소현세자
1636년(인조 14) 겨울 발발한 병자호란에서 조선은 2달도 채 못 버티며 항복했고, 소현세자(인조 장자)는 볼모로 청나라로 끌려간다. 소현세자는 8년 동안 청나라 인맥과 신문물을 접한 후 귀국했지만, 조선에서 2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실록에 따르면, 전신이 검은 빛이었다고 한다. 자존감이 바닥이었던 인조가 세자를 독살했다는 것이 유력한 설로 알려지고 있는데, 정치적 노선이 달랐던 세자가 강력한 경쟁자로 여겨졌을 것이다. 야사에서는 인조가 청황제가 선물한 벼루를 소현세자에게 던졌다고도 전해진다.
인조의 두려움(내지 증오)가 잘 나타나는 부분은 후계자 지명에서 나타나는데, 원자(세자의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하는 원칙을 어긴 것이다. 소현세자는 3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인조는 손자가 아닌 봉림대군(인조 차남, 훗날 효종)을 후계자로 삼았다. 인조는 세자빈(민회빈 강씨)도 왕실저주사건과 연루시켜서 사사하게 된다. 대신들이 며느리도 자식이라는 논리로 선처를 구했으나, 조는 격분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狗雛强稱以君上之子
此非侮辱而何?
개새끼를 억지로 임금의 자식이라고 칭하다니,
이것이 나에 대한 모욕이 아니고 무엇이냐?
구추(狗雛, 개 병아리)는 한자어로 개새끼(속어)를 의미한다. 강빈의 아들 3명도 어머니의 죄로 인해 제주도로 유배되는데, 몇 년 후 장·차남은 풍토병에 의해 사망하면서 막내(석견)만 살아남게 된다. 1644년(인조 22) 심양에서 태어난 석견은 4살의 나이에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며, 1649년 효종(숙부)이 즉위한 후에도 유배지를 남해·강화도로 옮겼다. 1656년(효종 7) 11살의 석견은 귀양에서 풀려났으며, 3년이 지난 1659년 경안군(慶安君)으로 봉해진다. 하지만 1665년 20살의 나이에 사망했다.
KBS 드라마 추노에서는 청나라에서 소현세자를 모셨던 송태하(오지호 분)는 누명을 쓴 채 부하들과 함께 노비로 전락하게 되는데,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제주에서 구해온 원자가 경안군이다. 경안군의 후손은 강화도 등지에 흩어져 살아 왔는데, 조선 후기 반역을 꿈꾸는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명분이었다. 1728년(영조 4) 일어난 이인좌의 난에서 추대된 밀풍군(密豊君, 이탄)이 경안군의 후손이다.
의문의 승리을 한 폐주, 광해
광해군은 임진왜란 도중에 분조를 이끌면서 나라를 지킨 성과가 있었지만, 정통성이 약했다. 왜란 후 피폐해진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백성을 위한 실리적인 정책을 선택했다. 대외적으로는 명·후금과 화친하려 했고, 대내적으로는 대동법을 확대하고 호패법을 시행했다. 사림은 광해군의 실리주의가 사대에 어긋난다고 여겼고, 결국 반정으로 이어졌다. 1623년 3월 13일 새벽, 서인세력(이귀·김류 등)이 이끄는 군사들이 인정전(창덕궁)을 향해 돌진하면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금군(국왕 호위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능양군(훗날 인조)가 즉위했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되찾은 서인의 탐욕은 200년 넘게 조선 후기를 물들였다. 폐위 직후 가마를 탄 광해군은 도성 뒷문을 통해 강화도로 향했으며, 주변에는 왕비(유씨)와 시종이 있었다. 인조는 광해군의 업적을 폐정으로 규정 짓고, 광해군의 시대를 패륜과 혼란의 치세로 기록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조정은 반란군의 명분이 될 수 있는 광해군을 태안으로 옮겼다. 이괄의 난이 진압된 후, 다시 강화도로 옮겨 왔다. 1636년 겨울 광해군은 병자호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강화문에서 들었을 것인데, 심경이 찹착했을 것이다. 광해군은 외교를 통해 전쟁을 피하려 노력했건만, 쿠데타세력(서인)의 외교파국으로 결국 전쟁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이 끝난 직후인 1637년(인조 15) 봄, 조정은 강화도에 머물던 광해군(폐주)을 제주도로 이배하기로 결정한다. 폐주(廢主)는 폐위된 임금을 의미하다. 13년을 지냈던 강화도를 뒤로 하고, 폐주는 제주읍성 내 위리안치된 초가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1641년 7월 어느 흐린 날, 광해군은 폐주된 지 18년 만에 제주에서 숨을 거둔다. 삼베로 감싼 광해군의 시신은 제주성 내에 잠시 안치한 후, 남양주에 안장되었다. 유배기간 내내 분노하지 않은 채 말을 아꼈던 광해군은 말년에는 평온하게 보냈다고 하는데, 사망 전년도(1640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시방(제주목사)이 광해군에게 편의를 제공했다고 전해진다.
인조대 겪은 호란의 치욕은 어찌보면 광해군에게는 의문의 1승이었는데, 만약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지속되었다면 청의 2차례 침공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면서, 광해군은 패륜의 군주가 아닌 실용주의자로 평가받게 된다. 즉 명분의 시대에 잘못 태어난 실리의 군주이다. 인조정권도 광해군의 이름은 지웠지만, 결국 광해군의 정책 위에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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