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시 수준의 상황에 대비하는 직책이 준비되어 있다. 고려·조선시대에 체찰사가 있었다면, 현대에 와서는 계엄사령관이 있다.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도체찰사 이원익과 그의 신임을 받은 이순신이 있었다. 선조는 이순신의 능력을 제대로 알아본 사리판단이 빠른 인물이었고, 이순신은 기대에 부응했다. 여러 미디어에서 선조는 주로 무능하게 그리지만, 그 보다는 강한 이기심·질투심 탓에 덕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가장 큰 패착은 본인이 직접 전라좌수사로 특진(7계급)시킨 이순신을 끝까지 신뢰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권력은 부모·자식과도 나눌 수 없으니, 신하를 의심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5년 동안, 이순신은 한 차례도 패한 적이 없는 장군이었다. 하지만 가짜뉴스가 돌면서 난처해지기 시작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이순신은 이수일(명나라 선전관)이 말해준 작위소문을 믿지 않았다. 선전관(宣傳官)은 황제의 명령을 지방·외국에 전달하고 동향을 파악하는 공식사절을 의미한다. 가짜뉴스는 조정으로 흘러 들면서 정1품(도독)으로까지 포장되었고, 이순신의 제사방식을 도독에 맞게 치러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까지 선조실록에 남아 있다고 한다.
위기감을 느낀 선조의 조치, 처단
1597년 2월 정유재란 당시 선조는 통제영(한산도)에서 이순신을 체포·압송하여, 친국(親鞠, 직접 심문)하는 국청을 열었다. 국청(鞠廳)은 모반·대역 기타 국가적 중죄인을 심문·재판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특별재판정이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다음 3가지의 죄를 묻게 되는데, 순간적이나마 선조의 시기심이 극에 달했던 것 같다.
조정을 기만한 죄 : 어명 위배, 월권
적을 놓아준 죄 : 가토를 놓침
남의 공을 가로챈 죄 : 원균의 모함
선조는 가토 기요마사(제2군) 부대의 재침략한다는 소문을 듣고 이순신에게 출전을 명했지만, 이순신은 왜군의 거짓정보로 판단하여 어명을 거부했다. 또한 통영에서 무관시험을 치르게 해달라고 선조에 건의하였는데, 장수선발은 왕의 고유권한이었기에 역린으로 여겨졌을 수도 있다. 마침 원균은 전과를 과시하기 위해 왜군머리를 상부에 계속 올렸고, 이순신은 원균의 공적에 대한 의구심을 편지를 통해 류성룡에게 전하려 했다. 하지만 밀직내시가 이순신의 편지를 중간에 입수하여 선조에게 보고하자, 선조는 편지내용을 원균에 대한 모함으로 간주한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사란 직책을 이용해 전쟁 통에 휘하 장수를 모략했으니 죽어 마땅하다
군권력은 원균에게 인계되었는데, 선조의 질투심을 이용한 서인(원균 지지)의 모함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간신이 군주의 흉악한 감정을 이용하여 충신을 교묘하게 제거하는 경우는 역사적으로 흔하다. 참고로 5개월이 지난 7월, 원균이 이끄는 군자원(군함 150여 척, 수군 1만명)은 왜군의 야간기습에 의해 칠천량 앞바다에 모조리 수장되었으며, 원균도 전사했다.
전시 최고군령권자, 도체찰사
오후 6시에 시작된 국청장에 도열한 200여명의 문무백관 가운데 2명을 제외한 모든 신하들이 이순신을 역적으로 몰아갔는데, 특히 이순신의 수하에 있던 수군절도사들은 이 참에 이순신이 제거되길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을 옹호한 2명(이원익·정탁)이 있었기에, 이는 쉽게 결정될 일이 아니었다. 류성룡도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순신을 옹호하지 못했다.
공(公)은 공이고, 사(私)는 사
이원익(도체찰사·이조판서)은 정탁(좌찬성)으로 하여금 상소를 올리도록 했고, 정탁은 친국 내내 상소문을 소리 내어 읽었다고 한다. 찬성(贊成)은 정승을 보좌하던 의정부 종1품 관직이며, 참찬(參贊)은 의정부 정2품 관직이다. 이전 글 <잊혀져 있던 군정, 계엄>에서 조선시대 도체찰사는 오늘날 계엄사령관으로, 이는 의정이 전시에 겸임한 최고군직이라고 언급했었다. 체찰사(體察使)는 고려·조선대에 전시·변란 하에서의 군사·행정 총괄직으로, 1488년(성종 19년) 관리품계에 따라 명칭을 달리했다.
정1품 : 도체찰사(都體察使)
종1품 : 체찰사
정2품 : 도순찰사
종2품 : 순찰사
정3품 : 도찰리사
종3품 : 찰리사
임진왜란 직후 이원익(이조판서)는 도순찰사(평안도)를 겸직하면서, 선조의 피난길에 앞장섰다. 1959년 류성룡의 추천으로 우의정이 되면서 도체찰사(하삼도)를 겸했는데, 하삼도(下三道, 삼남)는 다음을 포괄하는 지역이었다.
호서지방(현 충청도) : 제천 의림지 내지 호강(湖江) 상류 서쪽
호남지방(현 전라도) : 김제 벽골제 내지 호강 하류 남쪽
영남지방(현 경상도) : 조령(鳥嶺) 남쪽
금강의 옛지명이 호강(湖江)이며, 벽골제(碧骨堤, 푸른 뼈의 둑)은 330년(백제 비류왕 27) 축조된 한반도 최초의 인공저수지다. 도원수(都元帥)는 특정지역의 국방을 특별히 강화하거나 외적침입으로 인해 대규모로 군을 동원할 경우, 각 지방군·병마절도사들을 일괄적으로 지휘하기 위해 임명하는 임시직 무관(정2품)이다. 도체찰사가 최고군령권자였다면, 도원수는 전투지휘의 직접적인 최고책임자였다. 통상 도체찰사는 1명만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발발 후에는 4명이나 동시에 임명했다. 하지만 4인의 도체찰사들이 김명원(도원수)에게 각각의 군령을 내리면서 혼선이 일자, 도체찰사를 다음과 같이 2명(남·북)으로 축소했다. 이원익은 권율(도원수)를 실질적으로 지휘했고, 류성룡은 이항복(병조판서)와 함께 후방을 지원했다.
이원익 : 남부 4도(경상도·전라도·충청도·강원도)
류성룡 : 북부 4도(경기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
이순신과 나라를 위해 결단한, 도체찰사
어명에 따라 도체찰사는 전시상황에서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선조도 이원익의 눈치를 봐야 했다. 이원익은 밤 11시가 될 때까지 아무런 말도 없이 맨 앞자리에서 지켜만 보고 있었는데, 참다못한 선조는 이원익에게 가타부타 말을 하라고 독촉했다. 이에 이원익은 다음과 같이 입을 열었다.
발언하라고 하시니 얘기하겠습니다. (이순신을) 죽이는 건 쉽지만 그 뒤에는 어떻게 할 건가요. 제가 납득할 수 있는 대안을 내놓으신다면 저도 따르겠습니다. 단 원균만 빼고 얘기 하십시오. 저를 설득하지 못하면 이 자리에 10년을 서 있어도 저는 못합니다
이원익은 도체찰사(하삼도) 시절 각 수영에 대한 현장점검을 직접 실시한 후, 수사들의 리더쉽·전쟁수행능력을 이미 평가해 놓은 상황이었다. 대부분의 신하는 이순신의 대안으로 원균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원익은 마치 이를 예상이라도 한듯 어름장을 놓은 것이다. 새벽 6시까지 이어진 문초·고문에도 불구하고 이원익이 뜻을 굽히지 않자, 선조는 체념하고 이순신을 풀어준다. 살면서 내 마음을 알아주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알 것이다. 이순신이 전설적인 공적을 남길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원익의 믿음과 그에 대한 감사함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원익은 이순신의 역량을 높이 평가했지만, 사실 둘은 사돈관계였다. 이순신의 서녀가 이원익의 서자와 결혼했었다. 사실 왕권사회에서 왕의 의견과 대립한다는 것은 자신 뿐만 아니라 가문의 절멸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와 신하들이 이원익의 판단에 군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만큼 이원익이 존경받는 인사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1723년 초간된 남학명의 회은집(晦隱集)에서는 이원익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영남사람들이 이원익과 류성룡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원익은 속일 수 있으나 차마 속일 수 없고,
류성룡은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 없다"라고 한다.
이원익은 60여년 간의 관직생활 중에 영의정을 6차례나 지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삼았으며, 광해군·인조 모두 첫 영의정으로 이원익을 택했다. 특히 인조는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당시, 이원익으로 도체찰사로 임명되면서 장만(도원수)를 지휘하게 했다. 왜란에 이어 호란에도, 이원익은 도체찰사로 나라를 수습했다. 영의정에서 물러난 뒤에는 낙향(광명)하여 초가집에서 가마니를 짜며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1631년(인조 9) 인조는 자그마한 관감당(觀感堂, 보고 느끼게 하고자 함)을 지어서 하사했는데, 이는 이원익의 청렴·소박한 삶을 담고 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당시, 김류(도체찰사)·김자점(도원수) 등은 지휘권 혼선을 겪었다. 정리를 해줘야 할 김류가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몽진할 때 호종하여 들어간 뒤 외부와 연락이 끊겨 뭘 해 볼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도 김류는 군사적 무능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여러 영화·드라마에서도 그렇게 표현되고 있다. 도체찰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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