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정부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극도로 심화시킨 사건이 있었는데, 국민의 목숨을 저버린 <한강 인도교 폭파>이다. 흔히 국민의 생명을 버리고 국가수뇌부만 먼저 피난간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서울을 수복한 한국정부는 한강을 건널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북한군에 협조한 서울시민을 부역자로 몰아 처벌했고, 이는 정부에 대한 불신을 가중시켰다. 또한 정부는 도강사건의 책임을 폭파책임자(최창식 공병감)에게 떠넘겨 사형에 처했고, 훗날 재심을 통해 무죄가 되었다. 정부 입장에서는 국민의 목숨을 건 국운의 결단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현대사 내내 힘 없는 국민은 정부의 말을 신뢰하는 대신 각자도생(자산축적 등)을 통해 생존을 스스로 책임지려 하지 않았나 싶다.
그 이전 5백년 동안 지속된 조선의 신분제와 지배층의 행태에서 느꼈을 권력층에 대한 불신이 무의식적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 당시 왕가·조정은 백성이 믿거나 기댈 대상이 아닌, 착취주체였다. 임진왜란 당시 한성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선조는 약 360년 후의 이승만 행태와 다를 것이 없었다.
국민을 상대로 한 기획투기, 강남
1960년대 이전까지 영동·송파 일대의 한강에는 다음 3개의 섬이 있었다.
잠실도(蠶室島)
부리도(浮里島, 구리도) : 현 잠실본동·아시아공원 일대
무동도(舞童島, 무등도) : 현 코엑스·한전부지 일대
무동도는 섬 남쪽에 어린아이가 춤추는 듯한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국가적 차원의 부동산 투기의 공간이 된 이후 서울을 대표하는 금싸라기 공간이 되었다. 1966년 12월 건설부는 <영동지구 토지구획정리예정지>를 지정했는데, 강북의 인구과밀을 해소하기 위한 신시가지(312만평 규모) 조성이 목적이었다. 이전 글 <병원하면 떠오르던, 청량리>에서는 1934년 일제가 조선시가지계획령을 제정하면서,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조선에 도입되었다고 언급했었다.

지주들에게 땅을 받아 개발한 뒤 개발토지 일부를 돌려주는 환지방식을 사용하면, 재정 없이 감보율(지주가 제공하는 토지의 비율) 조정을 통해 인프라 부지를 확보할 수 있다. 2000년 토지구획정리사업은 도시개발법으로 통합되었다.
1966년 지정된 영동지구 토지구획정리예정지는 새서울백지계획(김현옥)에 기반한 인구분산용 주택단지 컨셉에 그쳤으며, 구체적인 도로망(특히 고속도로)나 중심상업지구 배치 같은 구상은 없었다. 하지만 1967년 영동지구 가운데를 관통하는 경부고속도로가 확정된 이후, 영동지구 계획은 전면 재검토가 필요했다. 이 때 정부가 서울시에 내린 지시는 '고속도로 예정부지를 보상금 없이 확보'하라는 것이었고, 서울시는 사업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2개의 구역(영동1지구·영동2지구)으로 분할하기로 한다. 1968년 1월 경부고속도로 예정지가 포함된 영동1지구(서초·논현·역삼 일대)가 착공에 들어갔다.
1970년 11월 양택식(서울시장)이 남서울개발계획를 발표하면서, 영동2지구(대치·삼성·청담·압구정동 일대) 개념이 대중에게 각인되었다. 남서울계발계획은 봉은사 인근(5만평 가량)을 종합청사(상공부·한전 포함)로 조성하면서, 영동2지구를 개발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발표 직후 영동2지구는 토지구획정리지구로 지정됨과 동시에 강남 땅값은 수십배 폭등(평당 5,000원 → 수십만원)했다. 서울도시계획이야기(손정목 저)에서는 1970년대 초 윤진우(서울시 도시계획과장)과 청와대 경호실은 비밀리에 삼성동 일대 20여 만 평을 차명으로 사들였다 한다. 금융실명제나 토지공개념이 없던 시절이었기에, 차명거래는 큰 문제 없이 가능했다.
서울시는 고위층이 차명으로 선점한 사유지를 집단체비로 지정한 후, 토지주에게 그 대가로 요지의 처분권한이나 대토를 제공했다. 체비지(替費地)는 토지구획정리사업에서 공사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지주들로부터 땅을 조금씩 감보한(떼어내) 땅이다. 서울시가 체비지를 공공기관이나 재벌에게 강매하고, 체비지 매각수입은 서울시 계좌를 거쳐 차명주에게 흘러 들어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수개월 동안 모은 시세차익은 대통령·국회의원 선거자금으로 쓰였다고 알려져 있다. 1975년 정부기관의 강남 이전은 백지화되었는데, 국가안보(동남아 공산화 사태 등)가 명분이었다. 공산주의와의 대립각이 극에 달하던 시기에 불과 5년 뒤를 예측 못하진 않았을텐데.
1970년대 중후반, 영동지구 개발 과정에서 권력층이 개입하여 막대한 시세차익을 거뒀다는 소문이 돌았고, 1977년 말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사건 등 강남개발을 둘러싼 권력층의 의혹이 불거졌다. 결국 1978년 국회 국정조사 과정에서 체비지 매각과정이 드러났다고 한다. 영동2지구의 개발의도는 불순하거나 시끄러웠지만, 그 과정이나 결과 측면에서는 체비지 위에는 상공부 대신 한전(현 현대자동차 GBC 부지), 코엑스·무역협회가 자리하고 있다. 그럼 누가 손해를 본 것일까. 애초의 원주민? 아니 봉은사이다. 원주민들은 환지를 통해 폭등가치를 누릴 수 있었지만, 남서울개발계획 발표 전(1970년 8~9월)에 10만여평을 매각한 봉은사는 개발이익을 취할 수 없었다. 봉은사가 매각한 10만여평의 매각가액은 불과 5.3억원(평당 5,300원) 수준이었는데, 공익 목적의 부지라는 말에 회유되었다고 전해진다.
'부동산·금융투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부동산] 용도가 제한된, 주한미군 부지 (0) | 2026.08.25 |
|---|---|
| [금융] 실적주의 끝판왕, 헤지펀드 (0) | 2026.08.23 |
| [금융] 모든 것을 위협하는, 채권시장 (0) | 2026.08.20 |
| [부동산] 탄력적 규제, 분양가상한제 (0) | 2026.08.20 |
| [부동산] 한국과는 다른 일본, 아파트 (0) | 2026.08.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