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租界)는 개항기 외국인이 행정권·경찰권을 쥐고 거주하던 특수지역이며, 조선정부가 개항장에 설정해 준 공간이었다. 1910년 일제가 한반도 전역을 식민지화하면서, 자국 영토 내에 외국인의 조계를 원치 않았다. 1913년 일제는 각국과 조계철폐조약을 맺고, 1914년 4월 법적으로 모든 조계를 전면 폐지했다. 기존의 조계를 조선총독부의 일반행정구역으로 편입시킨 것이다. 1883년 제물포항이 개항되면서, 인천으로 들어 온 일본인들은 조계를 세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현재의 자유공원 남쪽에서 부터 바닷가까지 7,000평 가량을 조성했다가, 1895년 청일전쟁 이후에는 해안(현 신생동·해안동·사동)을 매립해가면서 조계를 확장했다.
1912년 확장된 조계지에 궁정통(宮町通, 도시 신궁의 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1890년 세워진 인천신궁(현 인천여상)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동공원(東公園)으로 불리다가, 해방 후인 1946년 신생동(新生洞, 새로 생긴 동네)이 되었다. 이전 글 <일제 도시개발의 한 축, 관사>에서도 1885년 경성 진고개 일대에 일본인 거류구역이 지정되었고, 청일전쟁 전후로 일본인 거류지가 급속히 형성 확장되었다고 언급했었다. 또한 <바다와 산업으로 전성기를 누렸던, 마산>에서 조계지(租界地, 거류지)는 외국인의 거주·통상을 승인하고 외국의 행정권·경찰권이 미치는 치외법권이 인정되는 지역으로, 주로 개항장에 설치된다고 언급했었다.
일제강점기 인천은 일본촌을 중심으로 한 다음 3개의 길이 번화가였다.
본정통(현 중앙동)
궁정통(현 신생동)
신정통(현 신포동)
본정통(本町通, 도시 중심의 길)은 일제강점기 당시 가장 번화한 공간을 표현하는 용어(행정명)이었다. 신포동(新浦洞, 새롭게 발전하는 포구)는 이전에 탁포(韓浦, 터진개)였는데, 원래 바다 방면으로 터져 있어서 생긴 지명이었다. 개항 이후 생긴 터진개는 선창리(다소면)에 속했다가, 1903년 부내면이 신설되면서 신창동(新昌洞, 새로 번창하는 마을)이 되었다. 신정통(新町通, 새로운 도시의 길)은 신창동과 의미를 같이 하고 있다. 1930년대 들어 개포동(開浦洞, 터진개 한자표현) 내지 화정(花町, 유곽촌)으로도 불리다가, 해방 후인 1946년 신포동이 되었다.
인천 개항기 국제무역항 인근에 위치한 궁정통은 본정통과 이어져 있었으며, 관공서·은행·호텔·요정·카페가 밀집한 상업중심지였다. 인천미두시장에 자본·사람이 몰리면서, 주변 싸리재·터진개 일대에는 유흥업종(요리집·주점·여관 등)이 들어섰다. 화월관·용금루 등의 요정이 유명했다. 1920년대 본정통·궁정통의 접점(현 청실홍실 자리)에 금파(金波)가 위치했는데, 러시아 여성이 운영했던 인천 최초의 서양식 카페 3층 건물이 있었다. 금파는 맥주·양주·커피와 함께 양식을 판매하는 고급 살롱형태로, 엘리트(지식인·예술가·사업가·투자자)의 사교장 역할을 했었다. 특히 미두취인소를 찾는 투기꾼들이 모이는 장소로 유명했는데, 인천미두취인소와는 직선거리 200m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금파는 고려회관으로 재개장되었다가, 한국전쟁 중 소실되었다. 현재의 신축건물 1층에는 청실홍실(신포본점)이 자리하고 있는데, 인천을 방문할 때마다 즐겨 찾는 음식점이다. 요즘 냉모밀·만두이 워낙 흔한 음식이긴 하지만, 청실홍실의 음식은 30~40년 전 어릴 적 맛이 느껴져서 좋아한다. 다만 웨이팅이 워낙 긴 편이라, 시간대를 잘 잡고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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