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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울] 일제 도시개발의 한 축, 관사

by Spacewizard 2025.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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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일제가 가장 시급히 진행한 일은 철도를 부설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철로는 경제적 수탈과 군사적 지배의 인프라가 되었다. 당시 철도산업 종사자는 전문직으로 인정 받았으며, 조선총독부 산하의 조직 중에서 가장 큰 부서가 철도국이었다. 그 만큼 철도국 관료는 많은 복지를 누릴 수 있었는데, 철도관사·철도병원이 대표적이다. 전국의 철도교통 요충지에는 최대 수백 동에 달하는 관사단지가 조성되었는데, 경성에는 다음의 지역 일대에 철도관사가 들어섰다.

 

용산구 한강로동 : 용산역(경부선·경의선·경원선)

용산구 효창동 : 효창역(경의선, 폐역)

중구 순화동 : 경성역(현 서울역, 1925년 개통)

마포구 서교동 : 신촌역(경의선)

은평구 수색동 : 수색역(경의선)

동대문구 전농동 : 청량리역(경의선·경원선)

 

최고의 복지, 철도관사

 

규격화된 관사들이 반듯한 토지구획을 통해 건립되었으며, 직급에 따라 다양한 규모·형태의 관사가 있었다. 기차역 근처에는 간부급이 거주하는 단독주택이 배치되었다. 단지 내부에는 여가생활을 위한 커뮤니티시설(운동장·공원·구락부·궁장 등)이 조성되었는데, 일본인 직원을 조선의 낯선 환경에 적응시키기 위해 신경을 많이 쓴 듯하다.

 

1910년대 철도관사는 막사형 연와조 목조 가건물 형태가 많았으나, 이후 벽돌로 벽을 세운 목조단층건물로 발전했다. 일본의 전통가옥을 근대화한 형태로, 시멘트 기와지붕을 가지고 었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조선가옥 특성이 가미되기도 했는데, 온돌난방이 결합된 것이다. 이전 글 <남부순환선의 부활, 위례과천선>에서는 1943년 철도국이 현재의 의왕역 일대를 철도기지화한 후, 철도국 종사자를 위한 소규모 신도시를 계획했다고 언급했었다. 참고로 1943년 12월 조선총독부 산하 철도국이 폐지되면서, 철도행정·운송 업무는 신설된 교통국으로 이관되었다.

 

전국에서 가장 철도관사는 용산역 주변으로, 50만평 부지 내에 120동과 부대시설(철도국·구락부·운동장·철도병원·철도학교·철도공장 등)이 들어섰다. 현재는 철도병원(현 용산역사박물관) 건물만 남아 있으며, 경의중앙선(용산역·이촌역) 선로 동쪽으로 관사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고 보면 된다.

일제강점기 용산역 주변 철도관사 부대시설 [지도:카카오맵]

나라 안 최고급 저택, 총독관사

 

일제강점기 고위관료 관사(관저)는 등급별로 그 규모가 정해져 있었는데, 총독관저의 규모가 가장 컸다. 주로 20~100평 규모의 관사에서 생활했으며, 고위관료들은 100평 이상(거실 2개 포함 방 8개)의 관저에서 거주했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조선에 다음 3개의 총독관저가 건립했다.

 

왜성대 관저 : 1910~1939년(30년) 사용

경무대 관저 : 1939~1945년(6년) 사용

용산 관저

 

갑신정변 다음 해인 1885년 조선은 일본과 한성조약을 체결하면서, 한성 내 일본인 거주가 허용했다. 조선정부가 제공한 왜성대(현 예장동) 부지에 일본공사관(2층 목조)을 신축했는데, 공사기간은 1885~1893년이다. 왜성대(倭城臺, 일본 성이 있는 언덕)는 일본인 관점에서 지어진 명칭으로, 남산 고지대에 자리 잡은 권력의 중심지이라는 자부심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였기 때문이다. 실제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중에 왜성대정(倭城臺町)이 있었으며, 일각에서는 기존 예장대(藝場臺, 무예연습장)가 왜장대(倭將臺)·왜성대(倭城臺)로 잘못 불려서 정착되었다고도 한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외교공관 설치권을 얻은 일본은 1880년 청수관에 일본공사관을 최초로 설치했다. 조선후기 청수관(淸水館, 현 천연동)은 돈의문 바깥에 위치했던 경기중군영 내의 건물로, 서지 연못가에 천연정(天然亭)과 함께 위치했었다고 한다. 이전 글 <계유정난의 시작, 서대문>에서는 1430년(세종 12) 모화루를 모화관으로 개칭하면서 그 앞에 홍살문을 세우고, 남쪽(현 금화초등학교)에 연못을 파서 서지를 만들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일본공사관이 전소되었고, 제물포조약을 통해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이후 이종승(금위대장) 저택을 2년 간 임시공사관으로 사용하다가, 1884년 신축된 교동 일본공사관은 갑신정변으로 다시 전소했다. 1884년 갑신정변 당시 전소한 일본공사관의 대체지로 녹천정을 철거했고, 그 자리에 일본공사관이 신축된 것이다. 1851년(철종 2) 박영원(영의정 역임)이 남산 기슭에 녹천정(綠泉亭, 푸른 샘이 흐르는 정자)을 세웠는데, 남산에서 경치가 가장 좋은 공간이었다. 녹천정 터에 공사관이 들어 선 이후에도, 일본공사관은 녹천정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전 글 <조선 기생과 일본 접대가 만난, 요정>에서는 1885년 진고개 일대(현 충무로·필동·남산동·예장동·주자동·회현동)가 일본인 거류구역 지정이 있었다고 언급했었다. 1895년 청일전쟁 전후로 진고개 일대에 일본인 거류지가 급속히 형성되었고, 점차 확장되면서 남대문통 3정목 주변으로 일본인을 위한 기반시설(영사관·우편국·이사청·경찰청 등)이 조성되었다. 남대문통 3정목은 오늘날 숭례문·대한상공회의소·남대문시장·한국은행·명동 일부를 포함하였으며, 1943년 구제개편으로 중구에 편입된 후 1946년 남대문로3로 개명되었다. 참고로 본정통(本町通, 혼마치도리)는 현재 명동·충무로 일대로, 당시 일본인 상업의 중심지였다. 1930년대 본정 1정목에 입구 기둥이 세워졌는데, 현재 서울중앙우체국 오른쪽 골목 입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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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에 따른 중심지 이동, 남촌

 

20년이 지난 1905년 체결된 한일협상조약(제2차 일한협약, 을사늑약)에 따라,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통감부가 설치된다. 참고로 1904년 러일전쟁 중에 체결된 일한협약은 재무·외교와 관련한 일본 고문의 의견을 따라야 하는 고문정치(顧問政治)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 때 사실상 국정의 자주성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1906년 통감부가 폐지된 공사관 건물은 사용하다가, 1907년 인근에 신축된 통감부 청사(르네상스 양식, 2층 목조)로 이전했다. 기존 왜성대 통감부 건물은 통감관저로 사용되었고, 1908년 이토 히로부미 공작은 추밀원 의장으로 전임하면서 통감관저를 떠났다.

 

1910년 8월 한일병합조약이 조인되면서, 왜성대 통감관저는 총독관저가 되었다. 경성이사청은 경성부청으로 전환되면서, 경성의 중심이 남촌으로 이동했다. 이전 글 <경성에 신세계를 연, 미쓰코시>에서는 일제강점기 경성의 상권이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2개로 구분된다고 언급했는데, 충무로를 중심으로 한 일본인 남촌상권과 종로를 중심으로 한 조선인의 북촌상권이다. 1910년대 남대문통 3정목 일대에 기반시설(도로·전차·전기시설 등)이 정비되면서, 북촌에 비해 근대화 속도가 빨랐다. 1926년 경성부청이 태평로로 이전한 후에는, 남대문통 3정목은 융·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7명의 조선총독이 왜성대 총독관저에서 생활했다.


1대 총독(1910~1916년) : 데라우치 마사타케
2대 총독(1916~1919년) : 하세가와 요시미치
3대 총독(1919~1927년) : 사이토 마코토
4대 총독(1927~1929년) : 우가키 가즈시게
5대 총독(1929~1931년) : 야마나시 한조
6대 총독(1931~1936년) : 사이토 마코토(4년 만에 재임)
7대 총독(1936~1942년) : 미나미 지로
8대 총독(1942~1944년) : 고이소 구니아키
9대 총독(1944~1945년) : 아베 노부유키

 

북촌으로 이동한, 총독관저

 

1926년 경복궁 내에 총독부 신청사가 준공되었는데, 왜성대 관저에서 생활하는 총독은 출퇴근과 경호의 불편함이 많았다. 이에 1930년대 총독관저 이전 방침이 결정되었고, 그 대상지로 경무대가 선정되었다. 경무대(景武臺, 복궁 신문)경복궁 북쪽에 위치한 후원으로, 주로 연회와 활쏘기 대회를 하던 공터였다. 1937년 착공한 경무대는 중일전쟁에 따른 전시경제통제로 한차례 공사중단을 겪은 후에서야 1939년 준공되었는데, 처음부터 정사각형의 평면 구성과 푸른색 기와를 갖추고 있었다.

 

해방 후 하지 중장(미군정청 최고책임관)이 관저로 사용하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이 집무실·관저로 사용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초반 북한이 서울을 점령했던 시기에, 3차례 서울을 방문했던 김일성은 경무대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1960년 윤보선은 경무대를 청와대(靑瓦臺, 푸른 기와)로 개명했고, 1993년 김영삼은 청와대를 철거했다. 1990년 현재의 청와대 본관이 신축되었다고는 하지만, 역사적 의미를 생각할 때 경무대의 철거는 아쉬운 점이 많다. 역사를 무조건 보존하려는 자세도 문제지만, 역사를 일단 지우고 보려는 정신은 더 위험하다.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고, 후손들은 역사를 통해 미래를 대비해야 하는데.

 

초호화의 대명사, 용산 총독관저

 

1904년 8월 일본은 대한제국으로부터 용산 일대의 300만평를 20만원(토지·가옥·분묘)에 매입하여 일본군 기지로 조성했는데, 이 곳은 조선시대부터 공동묘지로 쓰이던 땅이었다. 1908년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용산 일본군 기지 내에 사령관 관저(2층)을 건립했는데, 하세가와 요시미치(훗날 2대 총독)는 1904년부터 8년 동안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관을 지냈다. 러일전쟁 군비잉여금으로 지어진 사령관 관저는 네오바로크 양식의 궁전건축으로  매우 화려하고 웅장했으며, 준공 직후 고종(대한제국 태상황)은 이를 설계한 가타야마 도쿠마에게 훈장(훈일등팔괘장)을 수여했다.

 

당시 내지(일본)에서는 4성장군이 군대예산을 월권으로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왜성대 통감관저와 황궁(덕수궁)보다 큰 규모의 관저를 지은 것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결국 1910년 한일병합 이후에 총독관저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외딴 곳에 위치한 거대한 건물을 유지하는 비용이 워낙 많이 들어 거주용으로는 적합하지 못해, 주로 연회용으로 이용되었다. 현재 용산미군기지 내에 위치했던 용산총독관저는 한국전쟁 중에 파괴되었으며, 1960년대 초반에 철거하여 121병원을 신축했다.

 

1939년 새로운 총독관저(경무대)를 신축·이전한 후, 왜성대 총독관저는 역대 통감·총독의 초상, 유품, 애장품 등을 전시하는 시정기념관(始政記念館)으로 보존되었다. 해방 후 왜성대 총독관저는 국립박물관 남산 분관으로 잠시 사용되다가, 1950년대 철거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과거 남산의 상징이었던 중앙정보부가 왜성대 인근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식민지 통치와 군사독재의 권력장치가 한 공간에서 이어졌으니 땅의 기운이 보통이 아닌 공간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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