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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일본] 막부정치의 기반, 봉건

by Spacewizard 2026.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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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나라시대 말기) 일본에서는 장원(荘園)이 등장했는데, 개발영주(귀족·사찰·지방호족)의 의해 개간된 사유지였다. 당시 장원은 특권(조세면제)이 보장되었고, 헤이안시대(794~1185년) 초기에 본격화되었다. 9~10세기(헤이안시대 중기) 국가의 토지관리시스템이 붕괴되면서, 장원이 공령(국유지)의 50% 이상을 참식할 정도로 확산되었다. 장원의 확대는 국가재정의 붕괴를 의미했고, 11~12세기(헤이안시대 말기) 장원공령제가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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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윈하는 분권통치,봉건

 

장원공령제장원(사유지)와 공령(국유지)가 중층적으로 공존하는 체계로, 영주(귀족·사찰)의 사적 지배를 인정하면서도 쇼칸(荘官, 장원관리자)이 연공(年貢)을 징수했다. 연공 징수 과정에서 쇼칸의 중간착취구조가 형성되기도 했다. 결국 장원공령제는 봉건제의 경제·토지 기반이 되었다. 봉건(封建, 땅을 하사하고 통치를 허가함)은 중앙권력이 제후·영주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며 군사·행정적 충성을 받는 분권적 통치체제를 의미하며, 중앙집권 약화 시에 생겨나는 현상이다. 세계사적으로 다음 3개의 봉건제도가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주나라) : BC 11세기
유럽(중세) : 9~15세기
일본(막부) : 12~19세기

 

봉건제의 핵심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토지 중심: 영지(장원) 수여에 기반한 권력
분권화 : 지방영주 자치 강조

주종관계 : 상호의무(권력분리 : 충성·군사력)

이전 글 <점점 가난해지는 유럽, 게르만 후예들>에서 게르만족은 족장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부족장·전사의 관계에 기반한 사회체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게르만족이 유럽을 접수한 중세시대에 봉건제도가 정착한 배경에는 게르만족의 전통적 사회체계가 있었다고 언급했다.

 

봉건제의 필수요소, 무력

 

12세기(헤이안시대 말기) 조정의 중앙집권이 약화되고 장원공령제가 붕괴되면서, 급부상한 세력이 지방무사이다. 당시 지방호족은 토지수호와 반란진압을 위해 무장세력이 필요했고, 기존의 귀족사병 개념에서 독립세력으로 점차 변모했다. 지방무사는 무사가문(미나모토·타이라 등)을 세웠고, 이들은 가마쿠라 막부 수립의 원동력이 되었다.

 

사무라이(侍, 시)헤이안시대 귀족을 경호하는 하급무사을 지칭하는데서 시작되었는데, 고대 일본어 사부라우(さぶらう, 시중들다)에서 유래한 명사형이다. 16세기 사무라이로 음변화가 정착하면서, 에도시대 들어 무사계급 전체를 가리키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사무라이는 전투보다는 봉사·경호의 의미가 우선이다. 헤이안 시대 말기 양대 무사가문은 다음과 같았다.

 

헤이시(平, 타이라 가문) : 서부, 집권가문

겐지(源氏, 미나모토 가문) : 관동, 지방무사 네트워크

 

타이라노 키요모리는 호겐·헤이지의 난에서 미나모토 가문을 평정하면서, 1167년 무사 최초로 태정대신(太政大臣)에 올랐다. 이는 무사정권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으며, 키요모리는 외손자(안토쿠)를 천황으로 세우면서 권력의 정점에 섰다. 평가는 서부(이세·세토내해) 무역독점을 통해 부를 축적했지만, 키요모리 일족의 횡포는 귀족·민심 이반을 심화시켰다. 1180년(지쇼 3) 정변 직후 모치히토 왕자의 봉기로 겐페이 전쟁(源平合戦, 원평합전)이 발발했다.

 

무신 간의 전쟁, 겐페이

 

이전 글 <속절에서 명절로 체급을 키운, 추석>에서 홍백문화가 겐페이전쟁에서 유래되었는데, 헤이시의 붉은 군기와 겐지의 하얀 군기를 상징한다고 언급했다. 겐페이전쟁은 편을 가른 싸움의 상징이 되었고, 일본당구에서 복식내기를 겐페이(겐뻬이)라 부르게 된다. 호겐·헤이지의 난에서 패배한 미나모토 잔당(요리토모·요시쓰네)이 관동 지방무사를 규합하면서 반격에 나섰고, 평가를 격파하면서 무가정권(막부시대)를 열었다. 요리토모는 마쿠라에 기반을 두고 막부체제를 구축했으며, 1192년 조정(고토바 천황)은 요리토모에게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 정이대장군) 칭호를 수여했다.

 

이후 3개의 막부가 등장했는데, 각각 특정가문이 권력을 장악한 시기이다.


가마쿠라 막부(1185~1333년, 가마쿠라) : 미나모토 노 요리토모 창설
​무로마치 막부(1336~1573년, 교토) : 아시카가 다카우지 창설
에도 막부(1603~1868년, 도쿄) : 도쿠가와 이에야스 창설

막부시대에는 지배계층이 귀가(貴家, 귀족 중심)에서 무가(武家, 무사 중심)으로 이동했고, 주군·가신 간의 군사적 약정이 핵심이었다. 막부시대에 봉건제도가 자리 잡았는데, 이는 무사계급 중심으로 발전한 토지 중심의 주종관계(쇼군-다이묘) 체계이다. 쇼군이 다이묘에게 영지를 주고 충성을 받는 구조로, 중세서양의 봉건제와 유사했다. 다만 혈연·인연 중심의 끈끈한 유대가 강했다는 특징이 있으며, 가마쿠라 막부가 임명한 슈고(守護, 지방수호자)와 지토(地頭, 토지관리자)가 핵심역할을 했다. 가마쿠라 막부에서 지토가 장원 내 실권을 장악하면서 무사사유화가 가속되었고, 영주에게 예속된 장민(농민)은 조수·부역을 부담했다.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슈고가 장원·공령의 슈고우케(守護請, 연공징수권)을 독점하며 장원을 침탈했고, 농민은 소손(惣村, 농민 자치공동체)을 형성하여 장원으로부터 자립을 위한 저항운동을 펼쳤다. 당시 농민저항운동을 쓰치잇키(土一揆)라 불렀는데, 이는 전국시대 센고쿠 다이묘 성장과 봉건제 본격화의 토대가 되었다. 무로마치 막부는 남북조시대(1336~1392년)과 오닌의 난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기간 동안 실질통치력이 약했다. 1573년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무로마치 막부는 공식적으로 몰락했다.

 

1467년(오닌 2) 발생한 오닌의 난은 전국시대를 촉발시킨 10여년 간의 내전으로, 흔히 배신·하극상·불신·복수의 시대라 불린다. 슈고 다이묘들이 교토로 상경하여 전쟁을 치르는 사이, 센고쿠 다이묘(전국 다이묘)가 주군을 배신하고 영지를 차지했다. 센고쿠 다이묘는 원래 슈고 다이묘의 영지를 관리하던 대리인이었으며, 이들의 하극상으로부터 전국시대가 시작되었다. 오닌의 난이 끝난 후 교토는 폐허가 되었고, 센고쿠 다이묘들의 패권 다툼은 100년 가량 지속되었다. 하극상에서 시작한 전국시대였던 만큼, 배신·복수 중심의 무사문화로 자리잡게 된다. 오닌의 난 이후 센고쿠 다이묘의 독립이 가속되면서 지방분권이 강화되었다가, 에도 막부에서는 안정적인 봉건제가 운영되었다. 1868년 메이지 유신에서 사무라이 폐지와 함께 봉건제도 붕괴된다.


참고로 교토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원폭투하 대상지로 고려되었지만, 미국 전쟁장관(헨리 루이스 스팀슨)의 개인적인 추억(허니문)으로 인해 1차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1907년 스팀슨은 교토로 신혼여행을 갔으며, 이 때 교토의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 OSS(전략정보국) 보고서에서 교토의 문화유산(사찰·궁전 등)을 보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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