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도시

[조선] 아름답지만은 않던, 궁궐살이

by Spacewizard 2026. 2. 8.
반응형
 

 

조선시대 궁녀 식사는 계급·직책에 따라 달랐다.

 

상급 궁녀(내명부·상궁) : 기미밥 수령
일반 궁녀 : 쌀밥, 된장국, 2~3개 반찬(계절나물·젓갈·간장)
수라간 궁녀: 주방근무 중 남은 재료로 만든 음식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는 기미밥에 대한 장면이 나오는데, 기미밥수라상에서 남은 고급음식(홍반·곰탕·조림 등)이다. 가짜 광해(이병헌 분)이 팥죽 한 그릇만 먹고 수라상을 내가라고 하자, 궁녀들이 간만에 배부르게 먹는 장면이다.

 

홍반 : 팥 삶은 물로 지은 찹쌀 팥밥(상서로움 상징).
​곰탕 : 소뼈·꼬리 장시간 끓인 진한 육수탕(미역국과 함께 제공)
​조림 : 간장·양념에 조린 생선·고기·채소(갈치·고등어·연근 등)

반응형

궁궐 내에서의 식사, 자비 부담

 

일반 궁녀는 각 처소별 개인거처에서 방자·취반비·무수리와 함께 공동취사를 했는데, 사옹원에서 식재료(쌀·채소 등)를 자비로 구매하여 탕국·죽을 끓여 먹었다고 한다. 일반 궁녀는 육류는 거의 섭취할 기회가 없었기에, 고된 노동에 비해 영양부족이 심각했다. 일부 궁녀들은 왕의 간택을 받기 위해 나름의 미모관리에 신경을 썼을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 체중관리 위해 초마늘·새우젓 다이어트가 유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식초에 절인 마늘 2~3쪽을 식후에 섭취하면, 허리가 가늘어진다는 비방이 나돌았다고 한다.

 

수라간 궁녀는 뭐죽(맛있는 죽)을 만들어 먹기도 했는데, 수라상 차리다가 남은 재료(채소·잡곡·생선뼈 등)을 끊인 죽이다. 어릴 적 명절 외가집을 가면, 외숙모가 명절음식을 죄다 넣어서 끊여 준 적이 있다. 처음에는 비주얼이 너무 잡탕스러워서 꺼렸지만, 그 냄새와 맛이 너무 맛깔스러워서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기미상궁(氣味尙宮)은 수라상 각 반찬의 맛(氣味)을 보고 시식하며 안전성을 검증했던 상궁직책으로, 수라간(별시치부 산하)에서 경험 많은 일반상궁이나 지밀상궁급에서 선발되었다. 이전 글 <평생 궁에서만 지낸, 궁녀>에서는 상궁의 서열을 언급한 바 있는데, 기미상궁은 지밀상궁과 일반상궁의 중간급으로 보면 될 듯하다. 궁중에서 근무하는 관료(승정원·사관 등)는 자비로 식사를 해결해야 했기에, 기번(숙직) 시에는 공고상을 먹기도 했다. 공고상(供高膳)은 궁중·관아에서 숙직할 때 집안 머슴이 배달하는 도시락을 실어 나르는 소반(小盤)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궁궐에는 별도의 점심시간은 없었으며, 출근(오전 5~7시)부터 퇴근(오후 4~7시)까지 공복상태로 근무했다.

 

궁궐 내 기강해이, 세종 초기

 

1420년(세종 2) 10월 11일자 세종실록에는 2년 전(1418년, 태종 18) 사건에 대해 태종의 발언이 기록되어 있다.

쉰이 넘어가면서부터 불면증에 시달렸느니라

어느 날도 밤잠이 오지않아

시녀 장미를 시켜서 무릎을 두드리게 했는데

영 시원하지가 않아서 조금 꾸짖어 주고는 깜빡 잠이 들었느니라

그런데 갑자기 무릎이 아파서 놀라 깼는데

이건 주무르는게 아니라 두들겨 패는 정도였다

 

원경왕후에게 넘긴 궁녀가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아서, 태종이 직접 추궁했다. 궁녀는 태종의 심한 꾸짖음에 화가 가서 상왕의 조심성 없이 두드렸다고 실토했다. 태종은 자기사람을 잘못 다스렸다는 부끄러움이 앞서, 장미를 궐 밖으로 쫒아내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고 한다. 태종(상왕)이 2년이나 지난 일을 꺼낸 배경에는 궁궐 내 기강붕괴가 있었는데, 당시 태종은 4명의 내시·잡직서리를 참형에 처했다. 세종실록에는 장미가 궁궐 안팎에서 갖가지 사고를 친 뒤 참형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동명의 궁녀가 많던 시기라서 태종을 때린 장미와 동일인 여부는 확신할 수 없다.

 

1420년은 초기 궁궐 내 기강해이 사례가 많이 나와 있는데, 특히 태종이 화를 참을 수 없었던 사건은 원경왕후와 관련된 일이 있었다. 7월 원경왕후가 사망했는데, 그녀의 신주를 모시고 돌아오는 중에 내시들이 빈수레에 올라 타 앉았다가 적발되었다. 당시 신주를 모시는 행렬은 엄격한 예법을 따라야 했고, 수레·가마는 오직 정해진 대상(신주·상주 등)만 사용할 수 있었다. 원경왕후는 태종의 여색과 외척통제에 맞선 강인한 성향의 대비였는데, 태종과는 크게 3가지 사건으로 갈등이 있었다.

 

1401(태종 1) : 후궁 첫 갈등
1407(태종 7) : 처남(민씨 형제) 숙청
1418(태종 18) : 양녕세자 폐위

 

특히 1407년 태종은 처남들의 오만과 권력남용을 원경왕후 탓으로 돌리면서, 처가를 멸문지화했다. 결국 1407년 민무구·민무질는 자결했고, 1410년 민무휼·민무회는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또한 세종이 소비(대전 궁녀)에게 업무를 지시한 후에 다른 업무까지 맡긴 일이 있었는데, 소비는 이를 소헌왕후(세종 비)의 지시로 오해했다. 이에 소비는 불평과 함께 화를 내면서 소헌왕후가 맡긴 옷을 찢었다가 적발되었는데, 갑자기 찢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동기를 진술했다고 한다. 태종이 강원도에 거둥(擧動, 군사참관, 사냥, 민정시찰 등 공식외출)했을 때 수라를 담당한 여성 궁노비가 반감(궐내 반찬 담당 잡직)에게 고기를 달라고 하자, 누운 채로 다음과 같이 말하며 희롱했다고 한다.

 

지금 고기가 없으니 내 (勢, 불알)나 베어가라

 

궁궐도 인간군상들이 즐비한 곳이었고, 궁인들의 감정·본능도 억눌려 있었을 뿐이었을 것이다. 왕가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테니, 마음 속의 불편함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