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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역사/절기] 속절에서 명절로 체급을 키운, 추석

by Spacewizard 2025.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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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과거시험은 아래와 같이 총 8번의 시험을 치러, 문과 최종합격자 33명(무과 28명 별도)을 선발했다.

 

소과 : 초시·복시

대과초시 : 초장·중장·종장

대과시 : 초장·중장·종장 

 

이후 33명은 국왕 앞에서 전시(殿試, 마지막 논술시험)를 치렀다. 전시에서 임금이 당시의 정치적 현안에 대해 출제한 문제를 >책문(策問)이라고 하며, 최종합격자들이 책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작성한 답안을 >대책(對策)이라고 한다. 오늘날 대책은 어떤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계획·방법·문제해결수단을 의미한다. 전시가 중요했던 이유는 그 결과에 따라 등수가 정해졌기 때문이다.

 

이이가 치른 책문에 명절·속절의 구분에 관한 내용이 나타난다. 이이의 절서책에서는 중국성인의 고제(古制)에 맞지 않는 명절을 속절(俗節)로 보아야 하며, 속절에 해당하는 사명일(四名日, 설·한식·단오·추석)은 가례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했다. 주자가례에서 추구하는 사시제(四時祭, 시제)와는 달리, 사명일은 가례에 근거가 없음에 따라 묘제(성묘)를 지양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이전 글 <차문화에서 시작된, 차례>에서 사시제는 사계절 중 중월(음력 2월·5월·8월·11월)에 길일을 잡아서 집안(사당)이나 사찰에서 조상 내지 부처·보살에게 공양하는 제례의식이라고 언급했었다.

 

묘제는 묘에서 지내는 제사이며, 기일제(기제)는 사당에 있는 신주에 대한 제사이다. 하지만 이미 관습화된 사명일의 묘제관행을 폐지하기는 어려웠고, 그 대안으로 사명일을 사시제에 준하게 재평가한 것이 사시사명일(四時四名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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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의 조선에서 외면받던, 추석

 

경공(제나라)이 공자를 기용할 의향을 비추자, 당시 최고의 재상 안영(晏嬰)이 이를 반대했다. 이는 유가(儒家)는 번잡하게 장례·제사의 절차나 따지면서 현실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에게 이 일화를 들려주면, 안영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을 예상되는데, 그 만큼 현대사회에서 제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들이 많아지고 있다. 주자가 가례를 통해 장례·제사에 대한 절차와 방법을 자세히 기술한 이유도 이미 극도로 복잡하고 사치스러워진 송나라의 장례·제사의 절차를 간소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제례에서 중요한 부분은 절차가 아닌 마음자세는 의미였다. 죽은 조상이 현재를 살고 있는 나를 위하여 실제로 도와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는가. 다만 친족들이 모여서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고, 자신에게는 바른 삶을 영위하겠다고 다짐함으로써 충분한 것이다. 이전 글 <노자가 알려주는 인생에서 필요한, 각성>에서 언급한 각성과 유사한데, 결국 자신을 알고 수련하며 잘 대해주는 것이 현생을 살아가는 나약한 인간들에게 강력한 지침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이이는 갓 입문한 유학도를 위해 지은 격몽요결에서는 제례는 주자가례를 따르라고 하면서, 추석차례는 가을시제로 사당에서 간략하게 치르면되고, 인절미를 시식으로 올리라고 적어놓았다. 이이는 마음자세를 중시하는 주자의 생각을 이어 받아서 다음의 의미를 가진 신종추원(愼終追遠)을 강조했으며, 조선에 맞는 간소한 예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장례는 조심스럽게 하고,
제사는 조상의 뜻을 깊이 생각하며 따르라

 

사시사명일은 조선후기에 널리 받아들여졌으며, 송시열도 사명일을 절일로 부르기 때문에 묘에 가서 참배하는 예가 있다고 말했다. 19세기 전후로 사시사명일의 묘제는 한식(봄)·추석(가을)로 양분되었고, 특히 수확을 앞둔 추석은 농경의례로서 그 의의가 더 커져갔다. 설·단오는 묘제가 쉽지 않았는데, 낮이 짧은 설에는 궁궐에서 임금에게 새해인사를 올리는 정조하례(正朝賀禮)에 참가해야 했고, 날이 더운 단오에는 제사음식이 쉽게 부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가례적 명절로 남게 된 한식에 비해, 추석은 묘제와 농경의례적 가치를 동시에 가진 대명절로 도약한다.

 

추석 체급을 키워준, 일본

 

1934년 조선총독부는 의례준칙을 제정하면서, 제례를 통폐합했다. 기제·묘제 이외에는 설날·추석에만 간소한 차례를 지내는 것으로 정하고, 다른 제례는 모두 없앴다. 이후 현재까지 간소화된 차례절차가 이어지고 있다. 1938년부터는 일제의 총동원령으로 제기들을 공출해가기 시작하면서, 기제사도 치르기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MBC드라마 연인에서는 병자호란 난리통에 오랑캐가 놋그릇 제기들을 모조리 뺏어가는 바람에, 조선양반들이 조상에게 제사를 못 지낸다는 설정이 나온다. 금속이 부족했던 과거에는 금속제 제기가 귀금속과 견줄만한 재산이었을지도 모른다. 실제 조선시대에는 금속의 부족으로 왕실에서 흙으로 빚은 도자제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양반·서민들까지도 도자제기를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1943년 일제는 자원통제 일환으로 추석에 떡을 만들지 말고, 새옷도 입지 말라고 발표했다. 이러한 일제의 압박에도 숨어서 지내던 제사·차례는 그 소중함이 더 컸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소중함이 해방 이후에는 허례허식이 키운 계기가 되기도 했는데, 어쩌면 오늘날 설날·추석이 민족대명절이라는 타이틀을 단 것도 일제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1969년 박정희 정부는 가정의례준칙을 제정하면서, 제례의 간소화와 비용축소를 하고자 하였다. 기제사는 2대(조부·부)까지만 하도록 하고, 차례는 신정 아침에 떡국으로 밥을 대신할 수 있게 한 연시제와 추석은 송편으로 지내는 절사로 통일되었다.

의례준칙(1934년, 좌)과 가정의례준칙(1969년, 우)

사실 정답은 없었던, 제사정보

 

일제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세대가 1960년대 제사의 주체가 되었지만, 이들은 제사방식을 구체적으로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정부는 가정의례를 간소화·표준화하고자 여러 자료들을 참고하였겠지만,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 이후의 자료를 바탕으로 여러 잘못된 정보들이 혼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홍동백서(紅東白西)는 붉은 과일은 동쪽(오른쪽), 흰 과일은 서쪽(왼쪽)에 놓는다는 의미이다. 홍동백서에서는 왜색이 강하게 느껴지는데,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홍백문화 발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홍백문화는 1180년(헤이안시대 말기)에 벌어졌던 내전인 겐페이전쟁에서 유래되었는데, 당시 중앙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헤이시(平氏)의 붉은 군기와 지방세력 겐지(源氏)의 하얀 군기를 상징한다. 결국 1185년 겐지가 승리하면서, 이후 600년 이상 이어지는 무가정치(막부)의 시초가 되는 가마쿠라 막부를 수립하게 된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대표적인 홍백문화로는 홍백가합전(연말가요프로)과 겐페이(당구)가 있다. 해방 이후 한국정부는 왜색을 제거하고 반공사상을 강화하기 위하여, 좌청룡·우백호의 음양오행을 바탕으로 '홍백'을 '청백'으로 변형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조율이시(棗栗梨柿)대추·밤·배·감(곶감)의 순서로 놓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세종대 조정이 만든 세종오례의에는 상차림 앞줄에 생율(밤), 생이(배), 실상(잣), 산자(한과·과줄·박산), 은행, 강정, 약과, 호도(호두), 사과, 홍시(감), 대조(대추) 등이 놓여진다고 되어있다. 조선초기에도 대추를 맨 마지막에 놓았는데, 일제를 거치면서 대추가 맨 먼저 놓이게 된 것이다.

 

40대 중반이 어릴 적부터 각인되어 온 추석날 이미지는 1~2주 전에 벌초를 가고, 차례상을 위한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분주하게 장을 보며, 아침차례에는 친척들이 분주하게 시간을 맞춰서 모여들고, 예를 갖춰 차례를 지낸 후에는 차린 음식을 같이 먹으면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돌아가신 조상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들어 이런 풍경은 점점 희소해지고 있는데, 이는 차례는 물론 기제사까지 간소화하거나 없애는 집안들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9년 제정된 건전가정의례준칙에서는 세태를 반영하여 명절제례를 더욱 간소하게 규정하고 있지만, 전통적 유교사상이 사그러진 현대의 법령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조항이 아직도 남아 있다. 바로 차례는 명절 아침에 맏손자 가정에서 지내야 한다는 내용이다. 법령이 현실을 쫒아오지 못하는 모양이 진화적 불일치(Evolutionary Mismatch)와 유사하게 느껴지는데, 진화적 불일치는 몸의 진화속도가 문화·기술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제례에서 중요한 것은 법제·형식이 아닌 정성·마음이라는 것은 다시 한번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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