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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서울] 한성 인근의 묘지, 이태원

by Spacewizard 2026.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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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은 남산 남사면의 경사진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이전 글 <자연과 권력이 공존했던, 삼청동>에서 개인적으로 서울에서 좋아하는 길이 몇 개 있으며, 송월길·정동길을 거쳐 을지로1가를 잇는 길이 그 중 하나라고 언급했었다. 또 하나의 애정하는 길이 소월로(숭례문~한남동 남산관광고가차도)인데, 일상에 지칠 때면 자차나 버스를 이용하여 남산 중턱에서의 확 트인 전망을 감상하곤 한다.

 

2020년 이태원의 단독주택 재건축 현장에서 터파기공사 도중 무덤이 60여기 발견되었다. 해당 저택의 전주인은 삼성일가(이재용·이서현)으로 알려졌으며, 삼성일가는 광복 이후 불하받은 적산가옥을 70년 가까이 보유했다. 토광묘(土壙墓, 땅에 구덩을 파서 시체매장)의 발견은 이태원 일대에서 간혹 벌어지는 일이었다. 2021년 박나래는 이태원동의 한 주택을 매입한 후에도 높은 인기를 구가하다가, 2025년 큰 구설수·관재수를 맞았다. 절도와 관련하여 매니저들을 의심했고, 이에 대한 배신감에 매니저들의 폭로가 시작된 것이다. 항상 느끼지만, 가장 가까이 있던 이들의 배신은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만한 파괴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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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인근의 묘지, 이태원

 

조선시대 평민은 한성 내에 매장될 수 없었기에, 도성 외곽에 묻혀야 했다. 이태원(성저십리)은 공식적으로 묘지를 쓸 수 없는 곳이었으나, 조선후기에 규제가 느슨해지면서 묘지가 들어서기 시작했을 것이다. 신당동(광희문 밖)이나 애오개(소의문 밖)이 그랬다. 이전 글 <왕십리 옆 무당마을, 신당리>에서 성저십리(성 아래 10리)는 조선시대 한양도성에서부터 10리(4km 가량) 이내의 성외지역으로, 오늘날 대부분의 강북지역이 성저십리에 포함되었다고 언급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현 용산(대통령실·전쟁기념관·주한미군기지 일대)는 일본군 군영(20사단·보병40여단)이 위치했으며, 그 동쪽(이태원·황학동·보광동 일대)는 공동묘지였다. 일본군이 용산에 자리한 적은 과거에도 있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병참부대가 용산에 주둔했었다.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들어온 청군도 용산에 주둔했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은 용산을 군사기지로 본격 조성했다. 일본인 인구가 증가하면서, 용산에서 가까운 이태원에서부터 공동묘지 위에 주택을 조성했을 것이다.

 

1912년 묘지규칙(조선총독부)이 제정되면서, 관청에서 직접 공동묘지를 조성·관리했다. 초기에 시행된 조성된 곳이 이태원 공동묘지이다. 1938년 조선총독부는 이태원을 지나는 남산주회도로를 개통한 후, 한남동에 고급주택지를 건설했다. 그 과정에서 이태원 공동묘지는 이장·파묘되었는데, 무연고 2,800여기 가량은 경성부에 의해 망우리 공동묘지에 합장되었다. 유관순이 망우리에 묻혀 있다. 1920년 이화학당은 유관순의 시신을 수습하여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했지만, 1936년 무연고자로 분류되어 이장된 것이다.

 

도로가 뚫리면서 생긴, 신도시

 

남산주회도로는 말 그대로 남산을 주회(周回, 주위를 돌다)하는 도로로, 용산에서 이태원을 지나 일본인 주거공간(장충동·신당동)까지 이어졌다. 현재 이태원로의 대부분과 한남대로·장충단로의 일부가 남산주회도로였다. 조선총독부는 경성도심을 거치지 않고 경성동부와 연결하려는 목적이었는데, 그 덕분에 이태원 일대는 일본군 배후지역으로써 일본인 거류민을 위한 주거·상업공간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식민지도시계획에서 남산주회도로는 남산의 외곽도로 역할을 하는 교통축이었고, 이태원에 전원도시(신도시) 개념을 도입했다.

 

해방 후 일본군기지 부지에는 미군이 주둔했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태원은 주한미군의 유흥공간(기지촌)으로 변모했다. 1976년 이태원에 한국 최초로 이슬람 성원이 세워지면서, 이태원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한국정부가 이슬람교 측에 기부한 부지 위에 이슬람국가들이 건축비용을 지원했다. 이슬람 서울성원은 이태원동·한남동의 경계에 위치한다.

 

수 백년 동안 죽은 자를 품고 있었던 이태원의 지기는 만만한 것이 아니며,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행운·흥망성쇄의 변동성이 매우 클 가능성이 높다. 2022년 발생한 이태원 참사를 보더라도, 허망·참담은 한 순간에 들이닥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음기가 깔려 있는 이태원땅 위에는 큰 무게를 올리는 것이 좋다는 말이 있다. 가급적 재건축을 통해서 큰 변화를 주는 것도 좋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더라도 변화다운 변화를 주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박나래는 경매로 낙찰받은 이태원집에 표면적인 변화(인테리어·외관)만 준 듯 보이는데, 첫 자가였던 만큼 좀 더 신경을 썼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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