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용변과 관련하여 크게 당황한 사건 2개가 있었다. 포천 공사현장 방문할 당시 갑작스런 용변신호가 왔었는데, 주변에 마땅한 화장실이 없었다. 막 준공을 앞둔 건물로 뛰어 들어갔지만, 변기에는 물이 없었다. 이쯤되면 그냥 마른 변기에 일을 치를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성을 되찾고 공터의 간이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설치된 지 2년이 지난 간이화장실의 광경은 굳이 묘사하지 않겠지만, 살면서 볼 수 있는 최악의 비주얼이었다. 심지어 발바닥 닿을 곳을 참지 못해 뒤꿈치를 들려고 노력했던 기억과 최대한 빠른 시간에 용변을 끝내야 한다는 본능적 긴박감이 감돌았다. 집에서 따뜻한 패드에 엉덩이를 붙이고, 10분 이상 앉아 있던 순간들이 너무 귀하게 여겨졌다.
또 한 번은 제주출장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이륙과 동시에 심각한 용변신호가 온 적이 있었는데, 탑승 직전에 콜라를 들이킨 것이 문제였었다. 근데 하필 그 날 따라 난기류가 심했고, 착륙 때까지 비행기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었다. 당시 괄약근을 통제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나면 어찌해야 할지라는 고민과 함께 상공에서의 1시간이 10시간 처럼 느껴졌었다. 이렇듯 화장실은 공기와도 같아서, 가끔 정말 절실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전 글 <반복되는 부실의 역사, 아파트>에서는 1958년 건축된 종암아파트가 해방 이후 최초의 분양형 아파트로 평가받고 있다고 언급했는데, 주거용에 최초로 수세식 변기가 적용된 사례이기도 하다.
자연친화적 화장실, 측간
조선시대 화장실은 뒷간(측간·정이)이라 불렀는데, 악취 때문에 집 밖(내지 북측 뒤편) 구석진 곳에 세워졌다. 사찰에서는 화장실을 정랑(淨廊, 정이) 내지 해우소(解憂所, 근심을 푸는 곳)라 불렀는데, 정(淨, 깨끗할)을 사용하면서 번뇌를 비우는 장소를 상징했다. 한국전쟁 이후 경봉스님(통도사 극락암)이 화장실에 해우소 팻말을 걸면서 널리 알려졌다.
전근대 화장실은 땅에 구덩이를 판 후, 그 위에 놓인 나무판자 위에 양발로 쪼그리고 앉아 용변을 봤다. 양반가의 측간은 창문(환기)·지붕(폐쇄)·돌바닥(견고) 등을 갖추고, 겨울에는 난방을 위해 화로를 놓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서민들의 측간은 허술한 벽체·지붕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한겨울에 용변보는 일이 보통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1980년대 어린 시절 할머니댁에 가는 것이 두려웠던 이유가 화장실 문제였는데, 어두운 공간이라 더 그랬던 것 같다. 외가집에는 양옥과 기와집이 같이 있었는데, 기와집에 붙어 있는 뒷간이 밝아서 무서움이 덜 했던 기억이 난다. 이전 글 <맨션과 함께 화려했던, 빌라>에서 국민학교 5학년 때까지 살았던 2층 양옥집의 불편한 점 중에서 현관외부 화장실을 언급한 적이 있는데, 2층 외부에 위치했던 화장실에서 본 용변이 1층까지 떨어지는 소리가 굉장히 공포스러웠다. 자칫 빠지면 수 미터 아래로 떨어질 수 있었으니.
과거에는 생활이었던, 노상방분
현대인이 추운 겨울 바깥에서 용변 보는 것을 경험할 일은 없지만, 군복무 경험이 있다면 몇 번은 있을 것이다. 2000년도 임진강에서 치른 1주일 간의 혹한기 훈련에 대한 추억도 있는데, 일단 영하 20도 안팎의 기온에서 바지를 내리는 그 느낌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시원함이었다. 삽으로 판 구덩이 위에서 용변을 보는 동안, 항문을 스쳐가는 임진강 강바람의 차디찬 느낌을 잊을 수 없다. 더군다나 북녁에서 들려오는 야간 대남방송도 긴장감을 더해줬고, 일이 끝난 후에는 어설프게 매립된 똥지뢰들을 피하는 것도 여간 신경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잠시나마 조선시대 조상들의 용변보는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급한 용무를 화장실이 아닌 한적한 곳에서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실제 한성성곽 아래는 냄새가 심했고, 청계천도 물이 흐리지 않은 시기에는 인분이 눈에 띄었다고 전해진다. 조정도 노상방뇨·노상방분을 단속했겠지만, 공중화장실이 없는 상황에서는 생리적 현상을 막을 길이 없었을 것이다. 특히 장날에는 장터 근처의 개천가나 골목에서 퍼져나오는 악취도 장난 아니었을 듯하다. 또한 집 한 칸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지인의 화장실을 이용하거나 한적한 장소를 이용했을 것이다. 양반가 여성들은 외출하는 것을 꺼릴 수 밖에 없었는데, 집 밖에서 용변처리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출 전에 미리 측간을 찾거나 음용을 자제했다. 외출 중 불가피하게 한적한 곳을 찾아야 할 때에는 여자들끼리 서로 망을 봐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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