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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조선] 어머니와 북녁에 묻힌, 정종

by Spacewizard 2026.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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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중 북한 내에 위치한 2개(후릉·제릉)의 왕릉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서 제외되어 있다. 2개의 릉에는 정종과 그의 어머니가 잠들어 있는데, 이는 개국 초기 여전히 개경이 정치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엿보여 준다. 1419년(세종 1) 63세의 정종은 죽음을 맞이하는데, 태종·세종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안왕후와 함께 후릉(厚陵, 개성)에 합장되었다. 현재 후릉은 북한 개성특별시 판문군(구 개풍군) 영정리 백마산 기슭에 위치하는데, 이는 정종이 퇴위 후에 거쳐했던 인덕궁 근처이다. 1412년(태종 12) 정안왕후가 먼저 안장된 후, 1420년(세종 2)에 난간석으로 봉분을 연결하여 쌍릉이 되었다.

 

제릉(齊陵)은 이성계의 원비(신의왕후 한씨)의 단릉으로, 현재 개성특별시 판문군(구 개풍군) 해선리(풍천리)에 위치한다. 1391년 사망한 한씨는 1392년(태조 1) 절비(節妃)로 추존되어 조성되었고, 1398년(정종 즉위) 신의왕후로 추존되었다. 정종은 모계권위를 강화하려 했다. 1407년 태종의 명으로 대대적인 개보수이 이뤄진 후, 1408년(태종 8) 신의왕태후로 더 높여 추존되었다. 제릉은 조선왕릉 중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왕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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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적이 있어야 들어가는, 종묘 정전

 

서울 종묘에는 조선 왕·왕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신주(神主)는 다음과 같이 나뉘어 봉안되어 있다.

 

정전 : 본전(불천위 왕, 영구보관)

영녕전 : 별묘(정종·문종·단종·예종·인종·명종·경종 등)

 

불천위(永遷位, 영원히 움직임)왕의 신주가 정전(正殿)에 영구히 봉안되어 제사를 받는 특전을 의미하는데, 중국 주나라 봉건제에서 유래한 부조지전(不祧之典)이다. 불천위(不遷位)와도 같은 의미를 가진다. 불천위는 공덕이 뛰어난 왕에게만 부여되며, 5대(내지 4대)가 지나 신주를 영녕전으로 이전하거나 토장하는 원칙에서 예외로 인정된 영예로운 지위이다. 연산군대 성종을 처음 불천위로 올리면서 제도화되었는데, 국왕도 정전에 들기 위해 실적이 필요했던 것이다.

 

영녕전(永寧殿, 영원히 편안함)은 태조의 4대조와 불천위가 되지 못한 왕의 신주를 모신 별묘이다. 또한 단명했거나 후사가 없었거나, 추존된 왕·왕비 등도 영녕전에 봉안되었다. 다시 말해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덜한 왕(정종 포함)이 영녕전에 봉안되어 있다. 1421년(세종 3) 5묘제의 관습에 따라 정전에서 나와야 하는 선조들의 신주를 모시려고 건립했다.

 

욕심이 없어 천수를 누린, 이방과

 

조선 개국 후 권력다툼으로 어지러운 시절, 이방과은 아버지(이성계)와 동생(이방원)에 의해 존재감이 많이 가려져 있다. 이방과는 청년 시절부터 아버지와 함께 전장을 누볐고, 황산대첩에도 참전했다. 과거(문과)에 급제한 이방원이 행정가였다면, 이방과는 군인이었다. 이전 글 <머리와 처세로 출세한 얼자, 하륜>에서는 이성계의 가계도를 게시한 바 있는데, 이성계에게는 다음 2명의 부인이 있었다.

 

신의왕후 한씨 : 향처(중종·태종 친모)

신덕왕후 강씨 : 경처(중종·태종 계모)

 

이성계는 각기 다른 분야에서 재능을 가진 향처아들의 도움으로 조선개국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공신그룹은 장성한 향처왕자(특히 이방원)을 견제했으며, 결국 어린 이방석(경처왕자)을 세자로 세웠다. 한성에서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이방원은 이방과(훗날 정종)를 세자로 옹립했고, 태조는 왕위를 내려 놓았다. 이방원이 스스로 왕위에 오르지 않은 이유는 명분(적장자 원칙) 때문이었을 뿐, 조정의 실권은 이방원이 관장했다. 개경에서 일어난 제2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간이 패배했지만, 정종은 이방원에게 선처를 호소했다. 제2차 왕자의 난이 개경에서 일어난 이유는 정종이 즉위 직후 수도를 개경으로 복원했기 때문이다.

 

정종은 재위기간(1398~1400년, 2년 2개월)에 거의 매일 격구를 즐겼는데, 이는 왕위욕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이방원을 안심시키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을 것이다. 1400년 11월 이방원에게 왕위를 양위한 후에도 1419년(세종 1)까지 인덕궁에서 자유롭게 유유자적한 삶(격구·사냥·온천·연회 등)을 즐겼다. 태종은 왕위에서 물러난 정종을 상왕으로 대우하며 극진히 존중했으며,세종 즉위 후에는 태상왕으로 격상되었다. 태종이 형(상왕)의 지위를 인정한 배경에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을 것인데, 왕통이 적법하게 이어졌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태조-태종-세종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이방과는 사후 262년 동안이나 정식묘효가 없이 공정대왕이라 불렸다. 태종·세종대 묘호 논의에서 정통성을 이유로 부결되었고, 성종대에는 선대 미시행을 이유로 보류되었다. 숙종 7년 왕실족보 오류 지적 후, 단종과 함께 정종으로 결정되었다. 정종(定宗)이라는 묘호에는 태조업적 계승과 정국 안정의 의미가 담겨 있다. 정종은 정안왕후와의 사이가 원만했음에도 자녀가 없었고, 대신 후궁에게서 25명의 자녀를 얻었다. 후궁을 들인 것도 왕실후사 문제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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