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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조선] 평생 궁에서만 지낸, 궁녀

by Spacewizard 2025.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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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에게 널리 알려진 궁녀 이야기 중에서 의자왕(무왕 아들, 백제 마지막 왕)의 삼천궁녀를 빠트릴 수가 없는데, 낙화암에서 삼천 궁녀들이 차례로 뛰어내렸다는 이야기다. 백제가 멸망하기 5년 전만 해도, 의자왕은 정복사업 차원에서 신라를 공격하여 30여개의 성을 정복했다. 역사는 패자의 기록을 왜곡하기 마련이다. 1941년 윤승한은 소설 김유신에서 의자왕과 삼천궁녀 에피소드를 언급된 이후, 소설적 상상이 역사서로 옮겨 왔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의 가부장적인 분위기 속에서, 신비감에 휩싸인 궁녀는 대중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는 문학적 허구가 현실적 역사로 왜곡된 사례가 많았던 시기로 보이며, 그 이미지는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뚜렷한 인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전 글 <뒤늦게 만들어진 배신 아이콘, 신숙주>에서 일제강점기 들어 출간한 일부 서적들에서 충절의 상징인 사육신을 찬양하고, 배신의 상징인 수양과 신숙주를 폄하하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언급했었다.

 

내명부의 하층, 궁녀

 

조선시대 내명부(內命婦, 궁궐 내의 여인)은 다음과 같이 2개층로 구성되는데, 이 둘은 시중을 주고 받는 관계로 그 계급차는 매우 컸다.

 

후궁층(後宮層, 내관) : 정1품~종4품

궁관층(宮官層, 궁관) : 정5품~종9품

 

후궁(後宮)은 왕의 여자(왕비 포함)을 총칭하는 말로, 경국대전에서는 품계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정1품 : (嬪)

종1품 : 귀인(貴人)

정2품 : 소의(昭儀)

종2품 : 숙의(淑儀)

정3품 : 소용(昭容)

종3품 : 숙용(淑容)

정4품 : 소원(昭媛)

종4품 : 숙원(淑媛)

고려시대에 시작된 궁녀제도는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는데, 숙종대에는 500여명까지 증가했다고 한다. 각 처소에 근무하는 궁녀는 상궁·나인 15명 수준(지밀 제외)이었다고 한다. 상궁(尙宮)은 왕가를 보좌하는 가장 높은 신분의 궁녀로, 각 처소마다 소속된 궁녀들의 업무들을 총괄하는 역할을 한다. 통상 5~6품의 직책의 여관을 상궁이라 불렀으며, 7~9품의 직책의 여관을 나인(內人)이라 했다.

 

상궁·상의(정5품)

상복·상식(종5품)
상침·상공(정6품)

상정·상기(종6품) 
전빈·전의·전선(정7품)
전설·전제·전언(종7품)
전찬·전식·전약(정8품)

전등·전채·전정(종8품)
주궁·주상·주각(정9품)

주변궁(종9품)

 

이성계는 궁녀의 녹봉(토지)을 높여서 후궁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태종은 궁녀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녹봉 대신 월봉을 지급하는 방안을 수립했다. 궁녀의 급여체계는 크게 다음으로 구분되었는데, 오늘날 기업의 연봉체계와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최근까지도 연봉계약서에 의복비·식대가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

 

의전 : 옷값(1년 2회)

선반 : 식사

삭료 : 매월 지급(쌀·콩·북어·옷감 등)

 

궁녀의 품계가 높을수록 월급은 높아졌는데, 지밀궁녀가 가장 높은 월급을 받았다고 한다. 궁녀의 월봉에 대해서는 법상 관직체제에서 배제되어 있었기에, 정기적인 월급을 받지 못했다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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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을 제외한 최고직, 제조상궁

 

상궁은 높은 수준의 월봉과 함께 하녀·침모가 제공되었는데, 상궁의 서열은 다음과 같았다.

 

제조

부제조 : 아리고(阿里庫, 아랫고)

지밀 : 대명(待命)

감찰

보모

 

제조(提調)상궁은 대체로 연륜이 있으며 인물·리더십이 뛰어난 자를 임명한다. 제조(副提調)상궁은 각 처소의 재물(왕실재산)을 관리하며, 내고간(內庫間, 안곳간) 옷감·그릇 등 출납을 관장한다. 감찰(監察)상궁은 궁녀들의 행동을 감찰·평가하며, 잘못을 저지르거나 법도에 어긋한 행동에 대해 형벌을 가하기도 했다. 왕의 자녀(대군·공주·군·옹주) 중에서 동궁에게는 2명의 보모(保姆)상궁이 있었고, 나머지 자녀에게는 1명의 보모상궁이 있었다.

 

궁녀 중에서 엘리트를 꼽자면, 20명 수준의 지밀상궁을 들 수 있다. 지밀상궁은 왕·왕비의 신변보호와 시중(의례·잠자리·식사)를 주된 역할로 했으며, 내전의 물품관리는 물론 내전을 드나드는 관료(내시부·내의원·전선사)와의 교섭도 도맡는다. 지밀(至密, 극히 은밀함)왕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며 항상 어명을 기다리는 처지였기에, 승은을 입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를 고려하여 지밀상궁 후보는 어린 나이(4~5세)에 입궁시켜 7~8세경부터 교육을 시작한다.

 

나인과 구분되는, 하녀

 

나인은 내인(內人)으로부터 유래했는데, 어린 나이에 입궁한 관례 전의 견습나인을 아기나인(생각시·각시)이라 하였다. 보통 12~13살에 입궁하으며, 지밀(4~5살)과 침방·수방(7~8살)은 좀 더 어린 나이에 입궁하였다. 보통 아기나인이 입궁한지 10~15년 지나면 관례를 통해 나인이 되며, 다시 15년이 지나면 궁녀가 되었다. 궁녀는 임무수행이 불가능할 때까지 종신제로 근무했다. 궁녀의 대표적인 근무처소는 다음과 같았다.

 

소주방 : 음식 마련

     내소주방 : 수라

     외소주방 : 궐 내의 다례·잔치에 올릴 음식

침방 : 궁중에서 필요한 의복 제작
수방 : 수 놓기
세수간 : 왕·왕비의 세수·목욕물 대령
생과방 : 과자·음료 제조

세답방 : 세탁, 다듬이질·염색

 

궁녀(상궁·나인)들은 다음과 같이 하녀를 두고 있었는데, 주로 나인으로 뽑히지 못하는 천민 출신이었다.

 

무수리(無水里) : 물 깃기, 불 때기

파지(巴只) : 청소

방자(房子)·비자(婢子) : 심부름, 방청소

약방기생(藥房妓生) : 의녀

 

이전 글 <이권이 많았던 계약직, 별감>에서는 조선시대 액정서에 내시·별감이 소속되어 있었다고 언급했었는데, 별감과 궁녀가 왕실생활을 지원하는 임무를 주로 맡았다. 영조 이후 액정서가 궁녀 선발·관리에도 관여하면서, 별감 집안 출신의 여성이 궁녀의 주류를 이뤘다.

 

궁 내에서 근무하는 궁녀들은 엄격한 위계·규율이 적용되었지만, 불상사가 없지 않았다. 내시·궁녀와의 부적절한 교제와 명령을 거역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고 한다. 여성인 만큼 폭력적인 사태는 없었지만, 왕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만큼 권력투쟁·음모에 가담하는 경우도 있었다. 왕을 구타하는 극단적인 사건도 있었는데, 불을 참지 못한 궁녀(덕중)이 세조에게 분노를 표출하거나 구타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람사는 세상에서 무슨 일인들 일어나지 않으랴. 혼인이 금지된 여인들이 폐쇄된 공간에서 평생 경쟁하여 살아가야 했던 만큼, 궁녀들 간에 대립·투기·모함이 상당히 빈번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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