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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생존을 위해 침공한, 태국

by Spacewizard 2025.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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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EAN(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동남아시아국가연합)은 동남아 10개국이 모인 지역협력기구로, 1967년 방콕에서 5개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싱가포르·태국)이 창설했다. 2024년 기준 동남아시아 1인당 명목 GDP(2024년 기준)은 다음과 같다.

 

1위 싱가포르 (88,452달러)
2위 브루나이 (35,090)
3위 말레이시아 (13,315) ​
4위 태국 (7,841)
5위 인도네시아 (5,271)​
6위 베트남(4,626 )
7위 필리핀(4,130)
8위 캄보디아(2,628)
9위 라오스(1,976) ​
10위 미얀마 (1,250)​

 

싱가포르가 압도적 우위에 있으며, 브루나이·말레이시아가 1만 달러를 초과한다. 1만 달러에 미치지 못하는 국가들 중에서는 태국 GDP가 가장 높지만, 관광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18% 가량으로 높은 편(동남아 평균 12% 수준)이다. 필리핀·베트남은 관광산업 의존도가 6-9% 수준으로, 생각보다 제조업 비중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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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아무도 뭐라 못하는, 태국 침공

 

2025년 12월 태국이 캄보디아를 전면적으로 공격했는데, ;특히 국경 인근 범죄단지를 군사화된 위협시설로 간주하여 집중타격했다. 범죄단지가 드론 지휘통제센터, 자폭드론 발사거점, 로켓저장소 등의 역할을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캄보디아 범죄단지는 태국과의 분쟁지역을 따라 주로 위치하며, 그 운영주체는 주로 중국계 범죄조직이었다. 이전 글 <스캠으로 유명해진, 캄보디아>에서 2013년 캄보디아가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합류하면서, 막대한 중국자본과 함께 중국계 범죄조직이 캄보디아·미얀마로 들어 왔다고 언급했었다.

 

태국의 과감한 군사행동은 전략적인 배경이 있는데, 우선 관광산업 비중이 큰 태국은 캄보디아에서 시작된 우범지대 이미지가 동남아 전체로 번지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태국정부는 이미 관광수지의 타격이 국가적 위기로 이어질 것이라는 직감을 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태국 내부의 정치적 위기상황(의회 해산, 총리 연쇄파면, 조기총선, 헌법재판소 개헌 갈등 등)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외부로 옮길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번 태국의 군사행동에 대해 미국·중국이 개입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태국이 너무나도 충분한 명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피해국가(한국·일본·대만) 입장에서는 태국의 군사행동에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을 것이며, 중국은 괜히 엮일까봐 우려될 것이다. 중국계 범죄조직은 캄보디아 범죄단지 내에서 여러 목적의 자금세탁이 이뤄지고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며, 심지어 중국에서 생산된 군사장비(드론 등)까지 캄보디아 범죄단지 내에서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태국은 중국계 국민·자본을 공격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중국은 유착관계에 대한 의심과 비난을 감안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 약소국, 캄보디아

 

9세기 이후 크메르 제국은 동남아의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었는데, 현 캄보디아를 중심으로 한 주변(태국·베트남·라오스 등)을 포함했다. 크메르의 수도가 앙코르였다. 1431년 아유타야 왕국은 앙코르를 침공·점령한 이후, 캄보디아 서부를 점령했다. 참고로 시암왕국은 14세기 이후 현 태국지역을 지배했던 왕국으로, 아유타야·라따나꼬신 왕조를 의미한다. 1939년 시암은 태국으로 개칭되었다가, 1949년 다시 시암을 거친 후 태국으로 확정되었다. 15세기 이후 프랑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캄보디아는 400여년 동안 주변국으로부터 주권의 위협을 받아 왔다.

 

19세기 초반 캄보디아는 시암과 베트남 사이의 약소국이었다. 1862년 프랑스가 베트남 남부를 식민화한 후, 다음 해인 1863년 8월 캄보디아 왕실은 시암과 베트남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랑스에 보호를 청원했다. 이 때 캄보디아는 인도차이나(프랑스령)의 일부(보호령)가 되었는데, 프랑스는 호치민(구 사이공)에 총독부에 두면서 프놈펜에 통감을 파견했다.​ 캄보디아 왕정은 유지되었으나, 베트남인 부역자를 활용한 세금착취는 캄보디아인에게는 불만이었다. 1941년 일본 점령 후, 1945년 일시적으로 독립되었다. 하지만 1946년 프랑스가 재점령했고, 1953년 노로돔 시아누크 왕이 완전한 독립을 이뤘다.

 

태국·캄보디아 갈등, 영토분쟁

 

20세기 초 프랑스는 시암왕국과 2차례 조약(1904년·1907년)을 체결하며 역내지배력을 강화했다. 이 조약은 영토를 인도차이나(프랑스령)에 양도한다는 내용이었고, 결국 당렉산맥 동부에서는 분수령을 따라 국경을 획정한다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분수령(分水嶺, 물길이 갈라지는 산마루)은 어떤 일의 흐름을 가르는 중대한 전환점이라는 비유적 의미로 자주 쓰인다. 프랑스 측의 측량사들이 지도 상에 모호한 부분을 남겼고, 특히 분수령 경계와 인접했던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 일대가 쟁점이었다. 이 때부터 태국·캄보디아 간 분쟁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프레야 비헤아르 사원은 양국의 국경(당렉산맥 절벽 위)에 자리한 11세기 힌두사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태국은 조약(1907년)으로 잃었던 영토 일부를 되찾았는데, 여기에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종전 이후 태국은 수복영토를 다시 프랑스로 돌려줘야 했으나, 1947년 태국군은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 인근으로 재진입했다. 1959년 캄보디아는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에 대한 자국의 영토주권을 확인해 달라는 소송을 ICJ(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했다.

 

캄보디아는 2차례 조약을 근거로 한 프랑스 식민지지도를 제시한 반면, 태국은 해당지도를 인정한 적 없다고 주장했다. 1962년 ICJ는 캄보디아 주장을 인용했지만, 1990년대 들어서야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이 개방했다. 캄보디아 내전 등으로 접근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2008년 캄보디아가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시키면서, 태국은 영토주권(주변 4.6㎢) 침해를 주장하면서 군사긴장을 고조시켰다. 이후 2011년까지 국경지역에서 몇 차례 무력충돌이 발생하면서, 캄보디아는 ICJ에게 다시 한번 명확한 판결을 요구하는 제소했다. 2012년 ICJ는 병력철수를 명령했으며, 2013년 ICJ는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과 그 인근지역이 캄보디아 영토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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