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명품관에서 오픈런은 익숙한 장면이 되었다. 과거 왕족·귀족의 전유물이었던 명품은 오늘날 사치재(럭셔리)라는 이름으로 대중화되었다. 과거 절대다수가 가난했던 시절, 모든 명품은 소수의 수요자(권력자)를 위해 장인의 수작업으로 탄생되었다. 마차시대 루이비통·에르메스는 유럽의 상류층을 위한 가죽제품을 만들던 사람이었는데, 특히 나폴레옹 3세(재위 1852–1870)와 그 가문의 후원이 크게 작용했다.
1837년 티에리 에르메스(독일계 프랑스인)는 그랑불바르(Grand-Boulevard, 현 파리 11구)에서 마구·안장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공방을 설립했는데, 초창기 유럽 왕실·귀족을 위한 고품격 가죽마구를 주력으로 했다. 특히 견고한 새들 스티치 기법으로 유명했다.
에르메스를 있게 한, 새들 스티치
새들 스티치(saddle stitch)는 마구·안장 제작에서 유래한 전통적인 수공 박음질 기법(2.5cm당 5~14회 바느질)으로, 에르메스의 장인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밀랍을 입힌 리넨실 양 끝에 바늘을 꿰어 2장의 가죽을 겹쳐 꿰매며, 하나의 실이 끊어져도 다른 실이 견고함을 유지한다. 에르메스가 사용하는 밀랍(wax)은 천연벌집(beeswax)에서 추출한 고체랍으로, 기계복제가 불가능한 스티치와 광택처리를 병행하면서 내구성과 미학을 겸비했다. 사실상 에르메스 전 제품에서 새들 스티치가 적용되고 있는데, 이는 제작기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이다. 버킨백 1개 제작에 1주일 이상이 소요된다.
에르메스가 귀족의 신뢰를 얻은 사고가 있었는데, 1842년 오를레앙 공작(루이 필리프 왕 아들)이 파리 근교에서 마차 추락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사고의 원인은 미구의 조악한 바느질과 그로 인한 내구성 부족이었다. 이후 왕실·귀족들은 마구의 품질을 중시하게 되고, 새들 스티치 기업과 고품질 가족소재를 사용하는 에르메스를 선호하게 되었다. 나폴레옹 3세 왕정에 인정을 받던 에르메스는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 de Paris)에서 1등상을 수상하면서 프랑스 최고의 마구장인으로 평가받게 된다. 참고로 19세기 후반 파리에서는 4번의 만국박람회가 개최되었는데, 나폴레옹 3세 시대 산업성장의 과시와 함께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1855년(샹드마르) : 나폴레옹 3세 주최
1867년(샹드마르) : 티에리 에르메스 1등상
1878년(샹드마르·트로카데로) : 샤를-에밀 에르메스 금상
1889년(샹드마르) : 프랑스혁명 100주년, 에펠탑 건설
프랑스는 만국박람회를 통해 명품브랜드의 국제적 명성을 알렸고, 1900년 파리 엑스포로 이어 나갔다. 샹드마르(Champs de Mars)는 파리 7구에 위치한 센강 남부의 초원지대로, 1751년 루이15세가 육군사관학교(École Militaire) 옆에 조성한 연병장이었다. 1790년 연맹제부터 공공행사가 열리던 장소로 활용되었으며, 19세기 중후반 산업전시의 상징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번화가로 자리를 옮긴, 2세대
1878년 티에리 사망 후, 샤를-에밀 에르메스(티에리 아들)는 사업영역을 마구 중심에서 가방(여행가방·핸드백)과 액세서리로 다각화했다.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안장으로 금상을 수상한 후, 1980년 포부르 생토로레 24번지(파리)로 매장을 이전하면서 부유층의 접근성을 높였다. 포부르 생토로레(Rue du Faubourg Saint-Honoré)는 파리 8구의 명품거리로, 포부르는 라틴어 포리스 부르검(foris burgum, 성벽 밖 마을)에서 유래했다.
Rue du : 거리
Faubourg : 중세 도시성벽 밖 교외지역

포부르 생토로레는 원래 농촌지대였던 공간이었는데, 17세기 말 귀족들이 저택을 지으면서 고급주거지가 되었다. 18세기(루이15세대) 콩코르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 개발로 급성장했으며, 19세기 오스만 남작(Georges-Eugène Haussmann)은 나폴레옹 3세 지시로 파리개조사업을 진행하면서 현대적 명품거리로 변모했다. 파리를 콩코르드 광장과 샹젤리제를 축으로 하여 엘리제 궁와 연계했으며, 좁고 비위생적인 중세골목을 넓은 직선대로(40~120m)로 재편했다. 오스만식 아파트(1층 상점, 상층부 부르주아 주택)이 건립되면서, 현재 파리의 파사드를 완성했던 시대이다. 19세기 후반 장인들이 포부르 생토로레로 진출하면서 럭셔리 상권으로 변모했으며, 마담 드 퐁파두르(루이15세 애첩)의 에브뢰 호텔(현재 엘리제 궁전, 대통령 관저)와 대사관들이 밀집한 권력중심지이다.
지금의 에르메스를 만든, 3세대
1902년 에르메스 3세대 경영이 시작되었는데, 샤를-에밀의 두 아들(아돌프, 에밀-모리스)이 합류한 것이다. 1920년대 에밀-모리스는 가방에 지퍼를 도입하는 혁신을 시행했고, 1937년 실크스카프(1937년)를 출시하면서 패션영역으로 확장했다. 이후 에르메스는 최고급 핸드백(켈리백·버킨백)의 대명사가 되었다. 켈리백이 클래식 아이콘이라면, 버킨백은 캐주얼 아이콘이다.
1935년 출시된 삭 아 데페슈(Sac à Dépêches, 급행가방)는 로베르 뒤마가 디자인한 사다리꼴 형태의 가방으로, 원래 남성용 브리프케이스(서류가방)으로 출시되었다. 안장 아래서 영감을 받은 견고한 구조와 잠금장치가 특징이며, 이후 여성용으로 발전했다. 1956년 삭 아 데페슈는 켈리백으로 불리게 되는데, 그레이스 켈리(모나코 왕비, 미국 배우 출신)가 삭 아 데페슈로 임신한 배를 가리는 사진이 라이프지에 실이면서 유명세를 탄 것이다. 1977년 삭 아 데페슈는 켈리백으로 공식명칭이 변경된다.
1984년 장 루이 뒤마(당시 에르메스 CEO)는 실용적인 토트백 디자인을 고안했는데, 이는 비행기(파리-런던) 내에서 듣게 된 제인 버킨의 투정에서 비롯되었다. 버킨(런던 출신)은 프랑스에서 가수·배우 활동을 한 패션아이콘으로, 1960~70년대 프랑스 팝계를 대표하는 연예인이었다. 당시 신생아의 엄마였던 버킨은 아기용품이 가득 찬 바구니를 들고 있었는데, 옆좌석의 뒤마에게 포켓이 많고 실용적인 큰 가방이 필요하다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버킨은 구체적으로 켈리백처럼 단단하면서도 4배 가량 큰 오픈토트 스타일을 원한다고 말했으며, 이에 뒤마는 즉석에서 멀미봉투 뒷면에 오뜨 아 꾸르아를 원형으로 한 스케치를 했다.
오뜨 아 꾸르아(Haut à Courroies, 높은 끈 가방)는 1900년 전후에 출시된 에르메스 최초의 여행용 가방이다. 안장·부츠를 운반하던 마구에서 유래한 러기지(luggage) 형태였으며, 가방을 고정하기 위핸 긴 가죽 끈이 달려 있었다. 버킨백은 켈리백의 트라페조이드(trapezoid, 사다리꼴) 형태에 기반하여 더 넓은 수납공간을 강조했으며, 켈리백의 단단한 박스형 실루엣에서 시작하여 상단 오픈토트 구조로 변형하면서 실용성(내부 통수납, 포켓 확대)을 높였다. 1985년 최초의 버킨백이 제작된 후, 1990년대 컬렉션에 데뷔한다.
2020년 루즈 에르메스(Rouge Hermes, 최초의 뷰티 컬렉션)를 출시하면서, 화장품 시장에 진입했다. 마차시대에서 자동차시대로 전환한 후에도, 귀족적인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럭셔리시장(핸드백·의류·향수 등)의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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