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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사회] 계속되는 간소화, 장례

by Spacewizard 2025.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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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령사회로 접어들면서, 매년 무연고 사망자는 증가 추세이다. 일반적으로 무연고자는 무빈소 직장(直葬)으로 치러지는 것이 관행인데, 이는 지자체가 최소한의 비용으로 시신을 화장하고 공동납골당에 안치하는 방식이다. 일부 지자체에서는 무연고자에게 공영장례를 치러주기도 하는데, 한 인간의 삶이 존엄하게 마감될 수 있도록 하는 배려 차원일 것이다. 최근 장례시장은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는 시대의 변화(조문객 감소, 무빈소 증가, 고독사 증가 등)와 관계있다. 장례문화가 간소화되면서 조문객이 감소하고, 이는 장례식장 매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음식매출의 하락으로 이어진다. 점차 수익성이 악화되는 장례식장은 문을 닫고 있다.

 

COVID-19 이후 연고자도 무빈소 장례를 치르는 경우가 많은데, 가족끼리 입관식을 치른 후에 바로 화장하는 방식이다. 평균 장례비용이 1,000만~2,000만원에 달하지만, 무빈소 장례는 200만~300만원이면 진행될 수 있다. 2018년 tvN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박상훈(박호산 분)은 사적 유대가 많지 않던 이지안(아이유 분)에게 할머니 장례비용을 주저 없이 부담하는데, 이는 드라마 속의 후계동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현실에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에게는 무빈소 장례이 유일한 대안이 될 수도 있다. 형식적인 절차를 중시하지 않는 방향으로 세태가 변화하면서, 고인들이 조용한 장례를 원하는 경우도 있다. 가족·친척과 단절된 채로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고독사는 사실상 연고 있는 무연고자로 직장으로 처리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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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 간소화의 시작, 일제

 

1934년 조선총독부는 관혼상제의 의식절차를 간소화하기 위해 의례준칙을 제정했는데, 이는 지나치게 번문욕례한 조선관례를 개혁한다는 명분이었다. 쉽게 말해 더 이상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오버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30년 넘게 조선인의 허례허식 관습을 지켜 본 일제가 의례준칙을 통해 개선하고자 했던 것인데, 당시 일제는 조선을 자신의 영토로 확신하는 단계에 있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의례준칙을 제정한 보다 현실적인 배경에는 전쟁준비를 위한 물자절약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는 한반도를 대륙진출의 전진기기로 삼아 총력동원체제를 갖추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물자를 절약하고 인력을 동원할 준비를 해야 했다.의례준칙 내용은 간단히 다음과 같다.

 

초혼 금지 : 혼인연령 정함

과다한 예물을 요구·제공 금지 : 예물자랑을 통한 사치 조장 금지

사치스런 장례 금지

 

일제의 의례준칙 이후, 한국에서 제정된 의례에 관한 법률은 다음과 같다.

 

1934년 의례준칙(조선총독부)

1957년 표준의례(국민재건운동본부)

1961년 표준의례(보건사회부)

1969년 가정의례준칙에 관한 법률(권고적·훈시적 법률)

1973년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강제적 법률)

1999년 건전가정의례준칙

 

오늘날 여러 의례는 일제의 의례준칙이 의도한 대로 간소하게 자리 잡았다.

 

일본에서 전래된, 장례문화

 

1934년 일제가 추진한 장례의식 간소화는 다음의 내용을 담고 있다.

 

굴건제복 금지
상복(염습 이후) 착용

장례기간 5일 원칙 : 최대 14일

삼우제 단축 : 우제 1회

운구 중 호창(상여소리) 금지

 

굴건제복(屈巾祭服)는 상주가 장제에 입는 차림으로, 굴건은 상주가 두건 위에 덧쓰는 건(머리쓰개)이다. 굴건은 좁은 띠 형태를 구부려서 만든 약식 건으로, 이를 고정하기 위해 수질(首絰, 짚으로 만든 둥근테)를 두른다. 상주를 제외한 상제는 굴건 없이 두건만 쓰게 된다. 상제(喪制)는 부모·조부모의 거상(居喪) 중에 있는 이로, 맏상제를 상주(喪主)라 한다. 궤연(几筵)은 죽은 이의 영궤(靈几)와 그에 딸린 모든 것을 차려 놓은 곳인데, 장례 후에 영위(靈位)를 모셔 놓은 자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수질로 고정된 굴건

상복은 두루마기에 통두건을 착용하거나 상장을 달도록 제한했으며, 양복을 입을 경우에는 완장을 차도록 했다. 오늘날 장례에서도 여전히 사용되는 완장·리본 문화는 모두 일본문화에서 전해졌다. 일제는 운구를 상여 대신 자동차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었는데, 이는 전통적인 상여행렬을 억제하기 위함이었다. 일제가 조선의 전통문화를 말살하려 했다는 주장도 많았겠지만, 기존의 관습이 지금까지 전해졌다면 매우 번거로웠을 것이다.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농촌사회에서는 전통적인 산역을 치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산역(山役)은 장사를 지내기 위해 무덤을 파고 관을 묻은 다음, 무덤을 완성하기까지의 일을 통틀어 일컫는 행사이다. 산역 필요인력을 모으기 위해 상가에서는 상례와 관련한 다양한 놀이가 행해졌는데, 대표적으로 빈상여놀이·선소리·상여래·달구질소리 등이 있었다. 구성원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잔치로 승화시킴으로써,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고 유족을 위로할 수 있었다. 3.1운동이 고종의 국상(1919년 1월 21일 서거)에 맞춰서 일어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1926년 6·10만세운동도 순종의 국장을 계기로 일어났었다.

 

1997년 초 외할아버지가 별세하셨을 때, 장례를 외가집에서 치렀다. 3일 내내 낮밤 없이 조문을 받았고, 옆채에서는 떠돌이 도박꾼들의 화투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매장하기 직전에 동네사람들이 관을 직접 들고 동네 여기저기를 돌았는데, 이는 생전 고인의 손길이 닿았던 추억서린 곳을 마지막으로 방문하는 의미였다.

 

조선인의 경제관념, 허례허식

 

번문욕례(繁文縟禮, 번잡한 글과 번다한 예법)는 세세한 규율에 따라 예법을 따져야 하는 제사·의식을 의미했으나, 오늘날 지나치게 번거로운 의식·예법·형식·절차를 의미한다. 번문욕례는 관료사회의 비효율·비능률성·형식주의를 비판할 때에도 사용되는데, 행정사무를 지연시키고 행정비용을 증대시키기 때문이다. 번문욕례는 방대한 공문을 묶을 때 사용하는 붉은 띠(red tape)로 번역된다.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제사는 친가·외가·처가 구분 없이 간소히 치러졌었다. 조선 후기 양반인구가 급증하면서, 기존 양반층은 신분 정통성과 위세를 과시하기 제사·의례·상차림 등에서 경쟁적으로 사치를 행하는 풍조가 생겼다. 납속·군공을 통해 신분상승한 신흥양반은 기득권을 따라하기 위해 빚을 내어 의례(관혼상제·잔치)를 벌이면서, 그 부채를 갚지 못해 노비로 전락하는 사례도 빈발했다고 한다. 벌어서 갚을 방도도 없는 상황에서 무리한 부채를 끌어다 사용했을 정도로, 스스로의 경제적 상황보다 남의 시선을 중시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인의 비교의식은 조선 후기에 태동한 허례허식 문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박지원은 허생전·양반전을 통해 실용적이지 못했던 양반의 행태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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