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90년대 창동(마산)의 밤은 화려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청소년 시절 창동은 학교로부터의 해방구였다. 창동 뒷골목에 위치한 콜라텍과 피카디리극장 자리의 나이트클럽은 젊은이들을 무아지경에 빠트렸지만, 30년이 지난 지금은 그저 폐허로 남아 있다. 1990년대 마산에는 많은 영화관이 있었지만, 연흥극장에서 흥행작을 많이 상영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에서 보여 준 깐느극장의 모습에서 과거의 추억이 많이 떠올릴 수 있었다.
조선 최초의 극장, 인천 협률사
1895년 정치국이 인천에 협률사(協律社)을 설립했는데, 이는 조선인이 세운 조선 최초의 민간극장으로 알려져 있다. 공연장·영화관이 결합한 형태로, 주로 인형극·창극·신파극·남사당패·연극이 공연되었다. 협률(協律, 서로 협력하고 율동을 맞춤)은 예인들이 모여 한마음으로 조화롭고유기적으로 공연을 펼치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전부터 명창으로 구성되어 전국 순회공연을 다니던 단체명이기도 했다. 인천 협률사는 축항사를 거쳐, 1920년대 애관극장으로 극장명을 변경했다. 이전 글 <100년 전의 파생거래, 미두>에 첨부한 지도에서 인천미두취인소 동편에 애관극장이 위치하고 있는데, 현재까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으로 남아 있다.
1902년 야주현(현 세종문화회관 서측)에도 협률사(協律社)가 설립되었는데, 이는 고종 황제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황실 주도로 세워진 최초의 근대식 황실극장(국립극장)이자 원형극장이었다. 500석 규모의 실내극장에서는 전통공연(창극·판소리·전통연희 등)을 공연되었다. 원래는 희대(戱臺, 궁내부 산하 공연장)가 있던 자리였다. 1906년 협률사가 문을 닫은 후, 1908년 이인직·박정동·김상천 등이 건물을 임대하여 원각사(圓覺社)를 출범시켰고, 여러 명창·예술인들을 전속으로 두면서 전통공연 외 근대연극(소설극화·신연극 등)도 공연했다. 하지만 1년 후인 1909년말 원각사는 공연을 중단했고, 1914년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1907년 2층 목조의 단성사(團成社)가 묘동(현 동화문로)에 설립되었는데, 묘동(廟洞)은 종묘(宗廟)와 가까워서 지어진 동명이었다. 1918년 박승필(영화제작자)이 단성사를 인수한 뒤 영화전용관으로 개조했는데, 국내 최초의 상설영화관이었다. 한 때 일본인에게 경영권이 넘어 갔으며, 1940년대 극장명이 대륙극장으로 변경되었다.
주변을 밝게 빛낸, 경희궁 현판
조선시대 동령동(東嶺洞, 동령골)은 동쪽에 황토현(황토마루)이 있다하여 붙은 마을명으로, 광화문빌딩(구 국제극장) 일대의 공간이었다. 이전 글 <공주댁 근처의 공간, 소공동>에서 조선시대 육조거리가 끝나는 지점(현 세종로 사거리)에는 나즈막한 언덕 황토현(황토마루)가 있었으며, 이는 관악산의 화기가 경복궁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것을 자연적으로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고 언급했다.
당주동(唐珠洞)은 당피동·야주현가 합쳐진 마을명으로, 야조현(夜照峴, 야주현·야주개·애주갯골)은 신문로·당주동 경계에 있던 고개였다. 흥화문(興化門, 경희궁 정문) 현판 글씨의 빛이 밤 중에 이 고개까지 비친다고 하여 붙여졌고, 경희궁도 야조개 대궐로 불렸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세종대로23길의 오르막길 인근이 야조현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1899년 방정환이 야조현(인달방)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전 글 <동학사상을 아이다움으로, 방정환>에서 방정환의 일대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훈조동(燻造洞, 메주가맛골)은 새문안교회터와 당주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 메주(관청 납품용)를 쑤는 메주가마가 있다하여 붙여졌다.
마산 최초의 극장, 환서좌
1907년(내지 1909년)경 마산부 야나기마치(柳町, 현 신창동)에 2층 목조의 환서좌(丸西座)가 세워졌는데, 이는 마산 최초의 극장이자 일본인을 위한 가부키 공연극장이었다. 회전무대를 갖추고 있어, 좁은 구조에도 500~600명 가량을 수용 가능할 수 있었다. 1910년대 이후 구마산에도 여러 극장이 세워진다.
도좌(都座, 1914년 개관) : 마산좌(1926년), 마산극장(1933년)
수좌(壽座, 1917년) : 1927년 폐관(현 신정탕)
앵관(櫻館, 1933년) : 1970년대 초 폐관(제일극장)
공락관(共樂館, 1936년) : 시민극장
1908년 마산부 석정(현 창동)에는 마산민의소(馬山民義所)가 건립되어 공회당으로 불렸는데, 이는 근대 시민의 토론장이었다. 참고로 석정(石町)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성호리·중성리 일부를 통합하여 설치했던 일본인 마을이었다. 이전 글 <바다와 산업으로 전성기를 누렸던, 마산>에서 1760년(영조 36) 설치된 마산창 일대에는 공관·민가가 집중되면서 6개의 자연취락이 형성되었다고 언급했는데, 여기에 성호리·중성리가 포함되어 있다.
일제가 민의소를 해산한 후에는, 마산구락부가 회관으로 활용했다. 1935년 마산구락부로부터 민의소 부지를 매입한 혼다 쓰찌코로우(本田槌五郞)는 공락관을 신축했는데, 혼다는 마산부 의원이면서 마산극장 소유주였다. 해방 이후 박세봉이 공락관을 인수했고, 1946년 시민극장으로 재개관했다. 해방 이후 개관한 다음 마산의 극장은 만남의 장소이자, 대표적인 문화공간이었다. 지금은 폐관된 마산의 극장명과 개관일은 다음과 같다.
부림극장(1956년) : 강남극장
자유극장(1961년) : 중앙극장
3·15회관(1963년)
태양극장(1970년) : 신태양극장
한일극장(1983년)
명보극장(1984년)
연흥극장(1988년)
동보극장(1988년)
피카디리(1989년)
태화1관(1991년)
'역사·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조선] 정치의 DNA, 비타협 (1) | 2025.12.07 |
|---|---|
| [역사] 산업혁명의 산업, 면직 (1) | 2025.11.07 |
| [시간] 한 해의 마지막 날, 할로윈 (1) | 2025.11.03 |
| [국제] 스캠으로 유명해진, 캄보디아 (1) | 2025.10.23 |
| [역사] 시장의 경계에서 시작된, 서울 (0) | 2025.10.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