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5월 개항 이후 마산포(구마산) 남쪽 2㎞에 위치한 해안마을(신월리·월영리) 일대에 각국공동조계지(훗날 신마산)가 들어섰는데, 일종의 계획도시였다. 조차(租借)는 외국이 다른 나라의 영토 일부를 일정기간 빌려(임대) 통치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으로, 조차기간이 끝나면 반환된다. 조계(租界, 조차지 설치 구역)은 외국인의 거주·통상을 승인하고, 외국의 행정권·경찰권이 미치는 치외법권이 인정되는 외국인 거류지로, 동아시아에서는 아편전쟁 이후 불평등조약에 따라 생겨났다. 조계지는 다음과 같이 구분되는데, 주로 개항장에 설치되었다.
전관조계지 : 특정국가에만 인정
공동조계지 : 여러 국가가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
1899년 11월부터 부산해관 마산출장소(전 마산창 자리)에서 총 4차례의 조계지 경매가 시행되면서 외국인들의 소유가 되었다. 1차 경매에서는 여러 국가들이 토지시세의 100배에 달하는 응찰금액을 제시할 정도로 흥행하였는데, 아마도 인프라(항구, 도로 등) 구축으로 인한 도시성장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근대 초창기 계획도시, 신마산
1900년 조계장정에 따라, 조계지의 도로폭은 8m 이상이어야 했다. 이에 마산 최초로 남북을 가로지르는 폭 14m의 신작로가 생겼는데, 상당수의 마산버스들이 운행하는 반월사거리에서 월영광장 교차로까지의 도로이다. 1901년 인근 도시에서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마산으로 유입되었는데, 이들은 러일전쟁으로 집결된 군인과 그들을 대상으로 생업을 영위하던 일본인들이었다. 이 때부터 조계지에 상점을 생기기 시작했으며, 1904년 이후 소학교(현 월포초등학교), 병원, 공공시설 및 일본인 어업이민촌이 연이어 생겨났다.
2차 경매까지만 해도 공동조계지(러시아·독일·미국·일본·영국·오스트리아 등) 성격이었지만, 1905년 러일전쟁과 을사조약, 그리고 마산선(마산-삼랑진)의 개통으로 일본의 전관조계지가 된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본인은 조계지를 넘어 구마산까지 진출한다. 1911년 일본은 마산항을 폐항하면서 일본과의 단독무역만을 허락했는데, 그 결과 마산은 물자수탈·일본수입의 통로가 되었다.
1912년 신마산·구마산을 연결하는 폭 14m의 도로(현 장군로)가 생기면서, 그 주변으로 지방법원지청과 전기회사(현 마산합포구청 자리) 등의 공공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이 때까지 10여년의 경과를 보아, 일본은 조선에 근대적인 도시계획을 도입했다는데 이의가 없을 것 같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신마산·구마산의 중간 위치에 폭 넓은 도로를 개설하면서, 그 중심부에 두 지역을 동시에 관장할 수 있는 공공업무구역을 형성한 것이다.

매립의 역사, 마산
일제강점기 마산만 매립사업은 24회에 걸쳐서 추진되었다.
1899년~1909년(개항기) : 9회
1910년~1919년 : 2회
1920년~1929년 : 3회
1930년~1945년 : 15회
마산 중부경찰서 맞은 편에 위치한 벽산블루밍아파트(전 삼익아파트)에 부모님이 10년 넘게 거주하셨는데, 이 부지는 1906년에 철도건설을 위해 최초로 매립된 공간이다. 1929년 현재의 신포동 일대에 대규모 매립사업이 추진되었는데, 1935년 준공되었다. 행교는 이 매립사업의 일환으로 가설된 교량이다.
이전 글 <근대 문화공간, 극장>에서 1907년(내지 1909년)경 마산부 야나기마치(현 신창동)에 2층 목조의 환서좌가 세워졌는데, 이는 마산 최초의 극장이자 일본인을 위한 가부키 공연극장이라고 언급했었다. 환서좌의 위치는 목가전평삼랑의 별장 맞은 편으로, 목가전평삼랑(目加田平三郞, 일본인 목재상)은 마산 월남동·창포동을 매립한 시행자 중의 한 명이었다. 1928년 목가전평삼랑이 2년 간의 매립공사 끝에 준공했는데, 준공 후 도로·구거·교량·물양장·호안석원, 그리고 공유지(100평 가량)은 국가에 귀속하는 조건이었다. 매립지 범위는 다음과 같다.
매립지 북쪽 : 철도공사시 매립부지
매립지 남쪽 : 세관잔교(개항 초기)
목가전평삼랑은 매립지를 기업과 일본인에게 분양했는데, 조선철도회사(마산·진주 간의 사설철도 운영)와 소화주류, 기선회사 등이 분양을 받았다.
달(월)의 고장, 신마산
857년(신라 헌안왕 1) 육두품 집안에서 태어난 최치원은 12세에 당나라 유학을 떠나 18세의 나이에 빈공과(외국인 대상) 급제했다. 10년 간 당나라 관직을 지낸 최치원은 28세의 나이에 귀국을 했으나, 신라의 현실에 실망한 나머지 벼슬을 마다하고 여러 지역(경주·영주·해운대·울산·지리산 쌍계사 등)을 떠돌았다. 당시 신라는 부패한 진골귀족과 지방세력 간의 세력다툼으로 인해 혼란스런 상황이었는데, 최치원은 유랑생활 끝에 경치가 좋은 합포에 자리를 잡았다.
최치원은 합포에 월영대(月影臺, 달그림자가 보이는 자리)를 세워 학문을 닦으며 후학들을 양성하기도 했으나, 왕건에게 보낸 글이 문제가 되어 해인사(가야산)로 숨게 된다. 문제의 글은 다음과 같다.
계림황엽 곡령청송(鷄林黃葉 鵠嶺靑松)
신라(계림)는 누런 나뭇잎처럼 국운이 시들어 가고,
고려(곡령)는 푸른 솔처럼 국운이 흥기할 것이다.
신마산 경남대학교 앞쪽 공간을 댓거리(월영대가 있는 길)라 부르는데, 불과 100여년 전만 하더라도 월영대 바로 앞은 해안가였다. 최치원과 관련한 지명이 신마산에 많이 남아 있는데, 특히 달(월)과 관련한 행정구역명(월영리·신월리·완월리·월포동·두월동·반월동 등)이 있다. 그리고 최치원의 자인 고운(孤雲)·해운(海雲)을 딴 해운동·고운로·해운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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