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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금융투자

[금융/역사] 100년 전의 파생거래, 미두

by Spacewizard 2025.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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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조선의 개항으로 얻고자 한 것은 쌀이었는데, 이는 매년 쌀 부족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조선의 쌀을 내지(일본)으로 들여오는 장기적인 전략을 펼쳤고, 이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미 공업화가 한창이었던 일본은 노동임금을 낮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필품(특히 식량)의 가격은 눌러놔야 했다. 1876년 조일수교조규(강화도조약) 이후, 다음의 순으로 개항이 진행되었다.

 

1842년 : 중국

1854년 : 일본

 

1876년 : 부산

1880년 : 원산

1883년 : 제물포

1897년 : 목포·진남포

1999년 : 군산

 

1899년 5월 1일 국내 6번째로 개항한 군산항은 쌀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공간으로, 일제강점기 내내 쌀 수탈의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쌀미자가 들어가는 동네명(장미동·미장동·미성동·미원동·미룡동 등)이 많다. 호남평야·논산평야에서 수확된 쌀은 군산항을 거쳐서, 내지로 흘러갔다. 1908년 만경벼을 신속히 수송하기 위해 전군가도(전주-군산 간 도로)를 포장했는데, 이는 국내 최초로 도로포장이었다. 1909년 당시 조선 쌀 수출량의 32% 가량이 군산항을 통해 내지로 빠져나갔다. 만경벼(만경별 쌀)는 품질·생산량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국내 재래벼 품종으로, 특히 만경평야(전라북도 김제)에서 많이 재배되었다.

 

조선의 쌀이 내지로 흘러가던 와중에도, 1918년 일본에서 발생한 쌀소동이 발생했다. 전쟁정보을 이용한 투기꾼의 매점매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1918년 일본은 시베리아 출병을 계획했는데, 1917년 소비에트에서 혁명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출병정보를 입수한 미곡상·상점은 대량으로 쌀을 매점하면서 1918년 8월 쌀가격은 석당 50엔을 돌파했는데, 이는 전년 대비 3배 가량 인상된 금액이었다. 쌀소동은 경찰로 진압할 수 없을 만큼 과격해지고 급속히 번지면서 군대까지 동원하게 되었다.

 

1920년대 조선총독부 경제정책의 핵심은 쌀증산이 되었고, 조선의 산업구조는 근대화(공업화)는 커녕 농업 중심의 식량기지로 재편되었다. 군산항의 쌀 이출량을 급증했고, 그로 인해 군산은 역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렸다.

 

오래 전 곡물파생상품, 미두

 

일본상인은 미두취인소(민관합작회사)를 설립하였는데, 명분은 재래시장 중심의 자율거래를 금지하고, 미곡의 품질·가격을 표준화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본질은 조선 전역의 쌀 거래·배급을 통제함으로써 내지로의 쌀수출을 효율적으로 하고, 곡물가격을 이용한 투기적 의도가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오사카 기미시장에서 투기거래로 파산한 일본상인들이 인천상권을 장악함과 동시에 투기거래에 익숙하지 못한 조선인의 토착자본을 빼앗으려는 의도인 것이다.

 

당시의 취인소(取引所, 거래를 취하는 장소)는 오늘날의 거래소이다. 미두(米豆)곡물시세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시세차익을 놓고 벌이는 선물(先物, futures) 거래를 일컫는 말로 변했으며, 화투보다 훨씬 판돈이 훨씬 큰 노름이었다. 미두취인소 거래는 선물청산거래로, 미래의 특정시점에 매매하기로 한 특정가격의 차액을 정산하게 된다. 중매점에 일정 수준의 증거금을 예치하면 누구나 거래할 수 있었으니, 전에 없던 10배의 레버리지 투기에 많은 투기꾼의 눈이 뒤집힐 수 밖에 없었을 것다.

 

국내 최대 미두취인소, 인천

 

1896년 개설된 인천미두취인소(인취)는 조선 최초의 선물거래소로, 일본인 미곡상 14명이 자본금 3만원으로 인천 내 일본인 거주지에 설립했었다. 인취가 일본영사관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해 허가를 받아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조선정부에 미친 일본의 경제적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처음에는 7개 거래품목(쌀·대두·석유·명태·방적사·금사·목면)을 취급하다가, 1904년 운영상의 문제로 거래품목을 2개(쌀·대두)로 한정했다.

인천미두취인소 위치와 전경사진 [지도:카카오맵]

인취의 시세는 오사카 취인소의 전보시세에 따라 변동했는데, 처음부터 투기성 거래가 활개쳤던 것은 아니였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쌀값변동성이 커졌고, 이후 미두취인소에도 투기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당시 인천미취에서의 쌀거래량은 다음과 같다.

 

1910년 : 2,000만석 수준

1918년 : 3,000만석 돌파

1919년 : 6,000만석 돌파

1920년 : 9,000만석 돌파

 

인천항에 모인 쌀은 가히 산처럼 보였을 것이다. 1918~1920년 투기로 인한 쌀거래량이 급증하면서, 쌀가격은 높은 변동성과 함께 폭등했다. 쌀 수출·거래이 증가하면서, 부두노동자·정미소·미두꾼의 수도 증가했다.

 

인취에서 일확천금을 이룬 극소수의 미두재벌은 전국적인 셀럽이 되었고, 중매점은 마바라(まばら, 소액투자자)를 유혹하기 위해 두재벌의 성공담을 담은 정보지와 비법서를 제작·판매했다. 현재 한국에서는 마바라를 부정적인 늬앙스로 사용되는데, 합리적인 판단 보다는 감정적인 판단(충동매매·본전집착 등)을 주로 하는 초보투자자를 통칭한다. 금융파생상품 투자의 승패는 개인 마다의 비법도 작용하겠지만, 결국은 제 때 찾아오는 타이밍(행운)과 욕망의 제어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전국적으로 확대된, 미두취인소 

 

1931년 공포된 조선취인소령에 따라, 인취가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경취)에 통합되었다. 이후 인취는 경취 기미부로 전환되었지만, 1930년대 중반 하루 100만석의 쌀거래로 오사카도지마취인소(세계 최초의 선물거래소) 거래량을 능가했다. 1930년대 들어 인천 외에 부산·목포·군산에도 미두취인소가 설립되면서, 일확천금을 노린 지방투기꾼들을 유입되었다. 채만식의 장편소설 탁류에서 당시의 군산을 다음과 같이 비유했다.

 

도박꾼의 공동조계(共同租界)요,

모나코의 유명한 도박도시인 몬테 카를로

 

미두로 떼돈을 벌 수 있다는 풍문이 퍼지면서, 충청·전라 지역의 부자집 자제들이 군산으로 몰려 들었다.마치 오늘날의 강원랜드와 비슷했을 것이다. 군산시가지에는 전당포·기생집이 즐비했을 것이며, 눈이 쾡한 미두꾼과 고리대를 노리는 정상배와 낭인이 거리를 가득 메웠을 것이다. 대부분의 미두꾼은 종국에는 몇 대째 내려오던 전재산(특히 토지)를 날렸을 것이며, 미두취인소는 조선의 토착자본을 흡수해갔다. 1937년 일제의 식량통제정책으로 쌀가격 변동폭이 동결되면서, 1939년 미두취인소는 폐쇄되었다.

 

1996년 코스피200 선물시장이 개장했는데, 미두취인소가 폐쇄된 이후 57년 만의 선물시장이다. 코스피200 선물시장은 슈퍼개미를 낳았고, 이들의 성공담을 쫒아서 수 많은 마바라들이 레버리지를 일으켰다. 미두취인소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99년 부산에 설립된 한국선물거래소(KOFEX, Korea Futures Exchange)는 국내 최초의 선물거래소로, 다양한 파생상품(미국달러선물·달러옵션·금리선물·금선물 등)을 거래할 수 있었다. 2002~2003년 한국의 선물·옵션 거래량이 세계 1위에 오르면서, 한국인의 강한 투기적 성향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2005년 KOFEX는 한국증권거래소 등과 통합되면서, 현재의 한국거래소(KRX) 파생상품시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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