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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조선] 정치의 DNA, 비타협

by Spacewizard 2025.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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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정치에서도 이념 불문하고, 집권세력이 정적을 인정(흡수)하지 않은 채 독선에 치우치면 필히 부패(더 나아가 분열)하게 마련이다. 현대사의 정치판을 보고 있으면, 조선시대 관료들의 고집스런 행태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현대 정치인들이 조선정치를 깊이 공부했을 가능성이 낮다고 전제하면, 그냥 민족성이 그런가 싶다. 이전 글 <공천권을 두고 시작된, 붕당정치>에서는 선조대에 이조전랑의 자리를 두고 사림파 내 선후배 간 갈등으로 동서분당이 되었다고 언급했었다. 처음이 어렵지, 분당은 계속되었다.

 

동서분당에 이은, 남북분당

 

선조대에 세력을 키우면서 위기를 극복한 기득권(동인)은 정적(서인)에 대한 처벌논조를 두고 다시 분열되는데, 이 때 동인은 다음과 같이 남북분당되었다.

 

강경파 북인(조식·서경덕 문하) : 정인홍·이산해·이발

온건파 남인(이황 문하) : 류성룡·우성전

 

당시 이산해·이발이 한성 북쪽에 거주했던 반면, 우성전은 남산 아래에서 살았다고 한다. 류성룡은 경산도 출신이었으며, 이황의 문인은 경상좌도(낙동강 동쪽)를 기반하고 있었다.

 

1407년(태종 7) 낙동강을 기준으로 경상도를 좌·우로 구분했는데, 좌·우는 한성(임금)의 시각에서 판단되었다. 참고로 다른 도의 좌·우 판단기준은 한강(경기도), 금강(충청도), 영산강(전라도)였다. 이후 경상좌·우는 몇 번의 합병과 분할을 반복하다가, 왜란 중이던 1596년(선조 29) 합병하면서, 대구도호부 달성에 경상감영이 설치된다. 이는 임진왜란을 겪은 조정이 대구도호부를 경상도·전라도를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년이 지난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면서 경상감영은 전소하게 되고, 북부(안동대도호부)로 감영을 이전했다. 1601년(선조 34) 접근성을 이유로 다시 달성으로 경상감영이 이전되었다.

 

남인은 시비분별보다는 정파 간의 협동에 통한 정국안정에 중점을 두었는데, 임진왜란 시국에도 남인은 경쟁세력(서인·북인)들과 공존하면서 정국을 주도했다. 하지만 북인이 임진왜란 중에 분조와 적극적인 의병지원을 펼치면서 정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고, 분조활동에서 지도력을 보여준 광해군과도 밀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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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계승자를 따른 대소분당, 북인

 

역사적으로 보면 정치세력의 분열을 촉발하는 발단에는 다음의 요인들이 있다.

 

개인적인 탐욕

정권창출 공헌도

세대갈등

미래권력에 대한 배팅

 

1606년(선조 39) 적통자(영창대군)이 태어나면서, 조정은 또 한번 분열을 맞이한다. 선조는 적통계승을 고집하며 세자책봉을 서두르지 않았는데, 이는 선조 스스로가 적통 출신이 아니라는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통계승에 대한 선조의 의지는 임진왜란 직전에 있었던 건저사건(建儲事件)으로도 알 수 있다. 선조는 후궁(인빈 김씨)의 소생(신성군)을 세자로 건저(책봉)하려 했는데, 당시 정비(의인왕후 박씨) 소생이 없었다. 이 때 광해군을 지지하던 서인(정철 포함)은 선조의 분노를 사면서 실각했는데, 이는 동인의 철저한 기획에 따른 정적 제거였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왕조가 붕괴될 수도 있는 위기상황에 처하게 되자, 피난하던 선조는 어쩔 수 없이 광해군을 세자로 삼았다. 하지만 종전 후 선조는 후계자를 광해군에서 영창대군으로 변경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북인은 미래권력을 두고 다음과 같이 분당된다.

 

대북파(광해군 지지)

소북파(영창대군 지지)

 

광해군을 위기로 몰은, 정인홍

 

1608년 선조가 숨을 거두면서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영창대군이 태어난지 불과 2년 후였다. 광해군는 대북파의 수적 열세를 보완하기 위해, 학문적 정통성을 확립하려 했다. 그간 상대적으로 정치에 소외되어 있던 남인과 협력관계를 구축하면서, 학문적으로는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고자 했다. 1610년(광해군 2) 광해군은 동인의 오랜 염원이었던 5현 종사를 전격적으로 허락하는데, 영남유생의 지지를 얻기 위한 방책이었다. 여기서 5현은 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을 말한다.

 

흔히들 종묘는 많이 들어봤어도, 문묘에 대해서는 익숙치가 않을 것이다. 종묘(宗廟)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공간인 반면, 문묘(文廟, 문성왕묘)유교의 성인·현자의 위패를 모시는 공간이다. 당태종은 공자를 유학 최고 성인으로서 문성왕(文宣王)에 추증했는데, 이후 공자(제자 포함)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문묘가 동아시아 전반에 분포하게 되었다. 1397년(태조 6) 완성된 문묘는 성균관이 관장했다.

 

하지만 1611년(광해군 3) 정인홍(대북파 리더)가 회퇴변척 상소를 올리면서 정국은 크게 변화했다. 회퇴변척(晦退辨斥)은 조식(정인홍 스승)이 이황으로부터 모함받은 부분을 변호한다는 구실로 올린 상소에서 이언적·이황을 비판한 사건으로, 회퇴는 각각의 호인 회재·퇴계를 의미한다. 이 사건은 스승 조식의 학통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정인홍이 벌인 개인정치로 평가받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남인·서인들이 단체상소를 통해 이언적·이황을 옹호하면서 정인홍을 비난하였다. 회퇴변척에 실패한 대북파는 다급해졌고, 더욱 배타적·공격적인 정책을 펼쳤다.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축출하면서 정적을 배격했다.

조선 5현 (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

조선역사의 가장 아쉬운 대목이다. 70대 중반의 정인홍의 비타협적인 사고·행동이 젊은 광해군이 추구한 협치정치에 찬물을 끼얹어버린 것이다. 이 때 광해군은 진퇴양난이었을 것이다. 정인홍을 배척하기에는 정치적으로 마음의 빚이 있었고, 그렇다고 그의 의견을 수용하려고 하니 힘들게 얻은 남인의 지지가 아쉬웠을 것이다. 회퇴변척 이후 정치적 위기감을 느낀 서인들의 각성은 결국 1623년 인조반정으로 나타났다. 이전 글 <노자가 알려주는 인생에서 필요한, 각성>에서 언급한 3번의 각성 중에서 서인은 적어도 첫 번째 각성을 하게 된 것인데, 서인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게 된 것이다. 만약 지방에 있던 정인홍이 상소를 올리지 않았다면, 광해군의 운명과 역사적 평가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인사권을 둘러싼 요직독점과 비타협적인 국정운영으로 인한 첨예한 반목·보복이 조선중기 정치판을 휩쓸면서, 결국 민생파탄과 외세침략(임진왜란·병자호란)을 자초했다. 조선시대 정치행태는 현대정치에서도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는데,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심리·욕망이 빚어낸 판에 박힌 정치판을 보고 있노라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이조전랑을 둘러싼 다툼은 200여년 간 지속되었는데, 정조대에 와서야 이조전랑의 권한을 폐지했다. 물론 그 전에 숙종은 자대권을 폐지하였고, 영조는 전랑을 6명에서 4명으로 축소하는 등의 단계적 폐지의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정조 사후 이조전랑의 손을 떠난 인사권을 국왕이 아닌 외척이 쥐게 되면서, 또 다시 노론독점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현대정치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말이 있다.


정치는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해는 것이다

 

정치가 한정된 자원의 배분결정을 다루는 만큼, 최선을 선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다만 최악 대신에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 때로는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선택일 수도 있다. 조선왕정의 정치에서는 미래는 없고, 최악만 선택되었다. 하지만 그 또한 인류역사의 한 대목으로, 그로부터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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