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십리는 광희문 바깥의 넓은 지역으로, 한성부 성저십리에 속했다. 고려시대 남경 동촌에 위치했던 왕심리(旺心里·往十里)가 17세기 이후 왕십리로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왕십리(往十里, 십리를 더 간다)는 조선 초기의 설화와 송별풍습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9세기까지 현재의 신당동·황학동·무학동·흥인동 일대는 행정적으로 왕십리계(往十里契)에 편입되어 있었다.
조선 건국 후 새도읍의 터를 찾던 무학대사는 오늘날의 왕십리 인근에서 소를 타고 지나던 노인을 만났고, 그 노인이 십리를 더 걸으면 좋은 터가 있다고 알려 줬다고 한다. 근데 훗날 무학대사가 초상화를 통해 자신이 만났던 노인이 도선대사임을 깨달았다는 설도 있는데, 오늘날 도선동(道詵洞)이 유래된 배경이다.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까지 풍수지리와 도참설로 유명했던 도선대사는 이미 한양을 명당으로 지목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실제 왕십리역에서 경복궁까지의 직선거리가 10리 가량(5.5km) 되는데, 도성에서 10리 가량 떨어져 있던 왕십리는 먼 곳으로 향하는 이를 배웅했던 송별의 공간이었다는 설도 있다.
생각보다 넓었던, 왕십리
조선시대 영남대로는 광나루에서 한강을 건너 충주·원주·영남 방면으로 이어지는 교통로였는데, 그 시작점이 왕십리였다. 왕십리에서 중랑천을 건너면, 뚝섬을 지나면 광나루로 나아갈 수 있었다. 조선시대 교통의 요지였던 왕십리 일대에는 성외시전이 발달했고, 상인을 비롯한 중인계층이 많이 거주했다. 왕십리는 채소재배지로도 유명했는데, 특히 미나리꽝도 많았다고 한다. 임오군란 당시 청군이 왕십리 일대를 초토화시켰었는데, 이는 당시 구식군인들이 왕십리에 많이 살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왕십리 주변에는 다음의 군사시설이 있었다.
훈련원 : 동대문 근처
군마목장 : 마장동 일대
연무장(演武場) : 뚝섬
이전 글 <지금과는 딴판, 왕십리·마장동>에서는 조선시대 양마장이 있던 마장동이 현재는 우시장이 되었다고 언급했었다. 1911년 10월 경원선(京元線, 용산-의정부)이 운수를 개시했을 당시, 왕십리의 동쪽 끝부분에도 정거장(현 왕십리역)이 있었다. 원래 독도역(纛島驛, 뚝도정거장)으로 명명했다가, 1914년 왕십리정거장으로 개칭되었다. 1940년대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되면서, 현재의 왕십리오거리 주변으로 시가지가 조성되었다.
광희문 밖 무당마을, 신당
성저십리(城底十里, 성 아래 10리)는 조선시대 한양도성(성곽)에서부터 10리(4km 가량) 이내의 성외지역으로, 오늘날 대부분의 강북지역이 성저십리에 포함되었다. 성저십리는 도성을 방어하는 군사적 공간과 도성으로 물품을 공급하는 상업적 공간이었지만, 조선 전기에는 우범지대에 해당되었다. 조선 중기 한성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성저십리로 인구를 분산하는 모민(募民, 인구유치) 정책을 시행했다. 18세기 후반에 와서는 한성부의 공식적인 행정공간에 속했는데, 주로 하층민들이 거주하는 공간이었다.
이전 글 <용산에서 태동한, 제과업>에서 조선시대 동안 한성 내의 산지는 벌목·채석·투장이 일체 금지되었기에, 도성 내의 주검들은 광희문을 빠져 나가서 서쪽으로 돌아 남산 기슭에 묻혔하고 언급했다. 광희문(光熙門)은 시구문(屍口門) 내지 수구문(水口門)으로 불렸는데, 시체·오수가 나가는 문이다 보니 일반백성들은 출입을 꺼려했다. 하지만 병자호란 당시 시급했던 인조는 광희문을 통과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바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도로 확장 과정에서 광희문이 훼손되었는데, 1975년 원 위치에서 남쪽으로 15m 떨어진 지점에 복원되었다.
조선시대 도성 내에서의 무속활동은 금지되었는데, 광희문 밖의 지역을 신당리(神堂里)라고 불렀다. 이는 시신을 매장한 후 노제(路祭, 길거리에서 지내는 제사)를 지내거나 신당(神堂, 신을 모시는 집)을 둔 무당집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 갑오개혁 당시 행정개편·한자정비 과정에서 신당리(新堂里)로 명칭이 변경되었는데, 이는 언어 표준화와 종교적 의미의 완화 등의 이유였다. 1911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당리가 독립된 행정구역이 되었지만, 여전히 왕십리와 같은 생활권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다가 1975년 난계로를 기준으로 신당동·황학동이 중구로 편입된다.
규격화된 조선시대, 도로
조선시대 도로는 토목기술의 한계로 대부분 자연지형에 따라 이어졌다. 조선시대 도로의 폭과 노면은 중국 고전을 참조하여 설계되었는데, 도로 폭은 궤(軌, 수레바퀴 자국의 개수)로 규정했다. 1426년 호조·공조·한성부가 논의한 끝에 정한 한성 내부의 도로 폭은 다음과 같다.
대로(大路) : 7궤
중로(中路) : 2궤
소로(小路) : 1궤
외방(지방)은 한성에 비해 도로 폭이 협소했지만, 경복궁의 대로는 예외적으로 9궤로 만들어졌다. 이후 경국대전에서 척(尺, 자) 단위의 법제화했는데, 이는 신체치수에 기반한 단위이다. 1자은 손가락을 폈을 때, 엄지에서 중지까지의 한 뼘 길이를 말하는데, 조선 후기 약 30.3cm~31.2cm로 통용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30cm 크기의 자가 그냥 1자였던 것이다. 경국대전에서는 도로 폭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척수로 확정되었다.
대로 : 56척(17.5미터 가량)
중로 : 16척(5미터 가량)
소로 : 11척(3.4미터 가량)
측구(배수로) : 2척(62cm 가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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