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인들은 해외여행을 국내여행 만큼이나 수월하게 갈 수 있지만, 1980년대만 하더라도 그러지 못했다. 1983년 관광여권이 조건부로 발급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점차 제한이 완화다가 1989년 1월 해외여행이 전면적으로 자유화되었다. 서울올림픽를 치른 지 3달 만이다. 그 전까지 정부는 국가발전에 유익한 목적(유학·출장·노동이주 등)에 한해서만 해외여행을 허가했는데, 일반관광 목적의 해외여행을 규제했었던 이유가 복합적이었다.
열악한 경제환경 속에서 외환보유고가 부족했기에, 관광(해외소비)를 통한 외화유출을 방지하고자 했었다. 또한 냉전시기였던 만큼 적국(북한)과의 접촉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었기에, 해외로 나가는 이들은 반공·방첩 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렇듯 과거에는 지정학적 위치와 국제정세가 해외이동을 크게 좌우했었다.
이탈리아에서 원나라로, 마르코
니콜로(마르코 아버지)와 마페오(마르코 삼촌)은 베네치아 출신의 상인으로, 몽골제국과의 교역을 하고 있었다. 쿠빌라이 칸은 유럽의 종교 문물에 관심이 많았고, 폴로 일가에게 교황친서와 기독교 관련 성유를 가져오기를 요청했다. 1271년 베네치아를 출발한 폴로 일가는 실크로드를 따라 이동했고, 3년 후인 1274년 대도(현 북경, 몽골제국 수도)에 도착했다. 쿠빌라이 칸은 크게 신뢰했던 마르코에게 17년 동안 원나라 관직을 맡겼고, 이 시기 마르코 폴로는 중국 전역을 돌면서 동방견문록을 저술했다.
다른 설도 있다. 니콜로·마페오가 무역을 위해 볼가강 방면으로 떠났는데, 당시 볼가강 일대는 킵차크 칸국과 일 칸국 간의 충돌이 있었다. 이전 글 <로마를 휩쓸고 급히 퇴장한, 훈족>에서 2세기 중앙아시아에서 서진하기 시작한 훈족은 360년 경 볼가강을 건너 최초로 유럽땅을 밟았다고 언급했었다. 폴로 일가는 안전을 위해 부하라로 이동한 뒤, 몽골왕족을 만나게 된다. 이후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중앙아시아와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대도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부하라(Bukhara)는 현 우즈베키스탄에 위치한 역사적 도시로, 부하라 칸국의 수도였다. 1500년경 우즈베크족(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이 티무르 제국을 몰아내고 차지한 지역이었다. 타클라마칸(Taklamakan,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사막은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위치한 모래사막으로, 타림분지(Tarim basin)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고비사막·하서회랑의 서쪽에 위치한 타클라마칸 사막은 극심한 일교차(낮 최고 섭씨 70~80도)를 보이며, 강한 바람에 의해 사구가 끊임없이 이동한다. 타림강이 사막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실크로드가 사막 가장자리(북부·남부)를 따라 형성되어 있다. 사막 주변의 오아시스 도시들은 고대 이후 실크로드 교역로 역할을 해 왔다.
하나로 다스리기엔 너무 컸던, 몽골제국
칭기즈 칸이 몽골을 통일한 후, 거대한 지역을 자손들에게 나눠서 통치하게 했다. 이 때 나눠진 지역을 울루스(Ulus, 칸국)이라 했다. 원래 대칸과 칸국은 종속적인 관계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칸국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대칸의 권위는 약화되었다. 갈등요소로는 대칸계승 불만, 생활방식(농경·유목) 차이, 광활한 영토 등이 있었으며, 결국 14세기 이후 다음 4개의 독자적인 국가(칸국)으로 분리되었다.
원나라(대칸국) : 중국·몽골
차가타이 칸국 : 중앙아시아
킵차크 칸국 : 러시아 남부
일 칸국 : 페르시아
킵차크 칸국은 훗날 금장칸국으로도 불렸는데, 16세기 이후 러시아인들이 몽골왕족들이 사용하는 금장(Golden Horde, 황금빛 천막)에 빗대어 부른 명칭이었다.
이전 글 <한때 한반도 외교를 이끈, 위구르> 테무진 가계도에서, 대칸들과 각 칸국의 시조를 기재했었다. 오고타이 칸국은 4대 칸국에는 포함되지 않는데, 초기에는 강력했으나 14세 초반 내부분열로 인해 차가타이 칸국과 원나라에 흡수되었다. 1218년 건국된 오고타이 칸국은 현재의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와 중앙아시아 북부(알타이산~발카슈호) 일대로, 원나라와 대립하면서 몽골 유목민 전통을 고수했다. 오고타이 칸 사망 이후 왕위계승 분쟁으로 쇠락하기 시작했는데, 카이두(오고타이 손자)의가 독립적 세력을 형성한 이후 점차 원나라에 흡수되어 갔다. 결국 1306년 차가타이 칸국에 병합되었다.
지정학적으로 해외이동이 어려웠던, 한반도
과거부터 한반도는 해외여행에 불리한 지리적 환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북쪽의 자연적 국경이 강(두만간·압록강)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국제정치적으로도 국경 건너 편에 적대세력이 자리하고 있는 시기에는 인적·물적 교류가 급감했었다.
불교국가 시절(통일신라·고려)에는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했었다. 이전 글 <중국에서 현지화된, 불교>에서는 신라 혜초가 중국 남해안에서 출발하여 동남아시아·천축을 거쳐 북부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으로 귀환했다고 언급했었다. 고려 초기 북부의 육로는 매우 위험했었는데, 거란(요나라)·여진(금나라) 세력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송나라·남송으로의 이동은 주로 해상로를 이용했다.
13세기 말에는 육로를 통한 여행도 적지 않았는데, 이는 원나라(1271~1368년)의 개방성 덕분이었다. 고려 말 이제현(문신)은 대도를 기점으로 중국 전역 3만km 가량을 여행했다고 한다. 14세기 중반 원나라의 경제·사회가 교초(紙幣)제 실패, 자연재해, 그리고 전염병(흑사병) 등으로 크게 쇠퇴했고, 이와 함께 중앙집권 체제가 붕괴되었다. 각 지역에서는 내부안정과 집권유지를 위해 대외교류을 줄여 가면서 자치적·폐쇄적으로 변했다. 마침 몽골의 침략·지배로 인해 아랍이 상업적으로 쇠퇴하면서, 아랍과 동아시아 간의 국제무역도 단절되었다.
명나라는 극단적인 폐쇄정책으로 해금정책을 시행했는데, 이는 왜구의 침략을 원천봉쇄하기 위함이었다. 명나라의 국경차단은 이웃나라의 무역·여행도 동반폐쇄시켰다. 명나라에 이어 청나라도 해금정책을 고수하면서, 고려 말 이후부터 조선인의 중국여행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신왕래의 목적지도 주로 북경에 한정되었다. 참고로 명나라 수도는 남경에서 북경으로 이전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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