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도시

[역사/신라] 신라를 상징하는 떡, 송편

by Spacewizard 2025. 10. 4.
반응형
 

 

삼국사기에 따르면, 유리이사금(신라 제3대, 재위 24~57년)시대 왕경(현 경주) 6부 여인들을 2팀으로 나누어, 음력 7월15일(백중)부터 8월15일(가윗날)까지 1달간 베짜기(길쌈)를 경쟁시킨 뒤 생산량에 따라 승패를 가렸다. 패자는 승자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면서 슬피 울며 노래를 부른 행사를 가윗날 축제라고 했다. 당시 다음의 왕경 6부는 행정구역을 넘어 신라를 건국한 정치적 지배세력들을 의미했기에, 가윗날 축제는 신라가 부족국가에서 고대국가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부족들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방편으로 시행되었다.

 

탁부

본피부

한기부

사탁부

잠탁부

사피부

 

지배층들이 참가한 행사인 만큼, 왠지 김쌈에서 졌다고 슬피 울었다는 것은 다소 은유적 표현으로 느껴진다. 아마 행사참여자들이 승패를 떠나 뒷풀이를 하면서 1달 동안의 노고를 격려하고 어울려 놀았을텐데, 이 뒷풀이를 가배(嘉俳)라고 하였다. 가배는 훗날 가우(嘉優)를 거쳐 가위로 변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세력 간의 대결을 오늘날의 스포츠처럼 가상전쟁 형식으로 치른 것인 만큼, 치열한 경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경쟁주체가 여성들인 것이 의아한데, 아마도 애초에는 밤·달을 상징하는 여성들이 쉬고 즐기는 시간이었을 수도 있다.

반응형

신라에서 유래한 8월 축제, 가배

 

한 해 중에 가장 큰 달이 뜨는 날이 음력 8월 15일이며, 크게 노는 날을 의미하는 한가위가 되었다. 가위에 한(瀚, 크다)이 합쳐진 한가위는 마침 하늘이 높고 야외활동하기에도 쾌적하여 왕실에서는 제사를 지냈고, 백성들도 이를 따라하여 묘제(성묘)를 갔을지도 모른다. 추석에 산소를 찾는 풍속은 신라의 경쟁국이었던 가락국에도 있었는데, 초대 수로왕의 묘제를 연 4차례(정월 3일·7일, 5월 5일, 8월 15일) 지낸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오경(시경·서경·역경·예기·춘추) 중의 하나인 예기(禮記)춘조월추석월(春朝月秋夕月)이 등장하는데, 이 문장에서 추석(秋夕)이 유래했다. 신라에 추석이라는 단어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예기가 삼국시대에 전해졌다는 점과 옥보고(신라 음악가)가 추석곡을 지었기 때문이다. 당시 8월 보름에 행해지는 의례는 신라 외의 다른 나라에는 없는 풍습이었다고 한다.

 

839년 6월부터 8개월 간 엔닌(일본 구법승)이 적산 법화원(산둥반도)에 머물렀는데, 이 때 저술한 여행기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신라유민들의 추석풍습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엔닌이 목격한 추석음식인 박돈·병식이 표기되어 있는데, 박돈(餺飩)은 대체적으로 국수·수제비로 보지만, 음식명으로 봐서는 송편으로 보기도 한다. 얇게 편 밀가루피를 의미하는 박(餺)과 소를 얇은 피로 감싸서 만든 음식인 돈(飩)이 합쳐진 말이기 때문이다. 병식(餅食)쌀·조·보리 등의 가루를 반죽하여 찌거나 구운 과자류인데, 중국에서는 8월 15일 중추절에 먹는 보름달 모양의 과자를 월병(月餠)이라고 한다. 중국 중추절의 역사는 추석에 비해 그리 길지 않은데, 명절로써 중추절이 널리 퍼진 시기는 12세기 남송시대이며, 이 때 월병도 중추절 음식이 된 것으로 본다.

월병 [출처:나무위키]

신라의 떡, 송편

 

보름달이 뜬 추석에 먹는 송편은 왜 반달모양일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그 연유가 적혀있다. 의자왕(백제 마지막왕) 말년인 660년 음력 6월의 일이다. 귀신이 왕궁으로 들어와 "백제가 망한다"고 외친 후 땅 속으로 사라졌는데, 그 땅을 파보니 거북이 한마리가 나왔다. 거북이등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백제는 둥근 달과 같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

 

당시 한 점술가는 "둥근 달과 같다는 것은 가득 차 기울어진다는 것이며, 초승달과 같다는 것은 점차 가득 차게 된다는 뜻"이라고 부정적인 해석을 하여 죽임을 당한다. 하지만 얼마 후 죽은 점술가의 해석대로 신라가 백제는 망하게 한 후, 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이후 신라가 초승달로 비유되었었다는 내용이 민간에 널리 퍼지면서, 신라사람들은 신라의 번성을 바라며 반달모양으로 떡을 빚기 시작했다고 한다. 소설같은 이야기인데, 신라가 통일되기 전에는 반달모양의 떡을 전혀 먹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송편이 추석음식으로 자리잡은 시기는 19세기 전후로, 생각보다는 역사가 길지는 않다. 1816년(순조 16) 정학유(정약용 차남)는 농가월령가를 지었는데, 여기에는 농가에서 매달 할 일과 풍속 등을 한글로 적어 놓았다. 이 농서의 8월령에 오려송편을 추석에 먹는다는 최초의 기록이 나온다. 오려(올벼의 옛말)는 제철보다 일찍 익은 햅쌀로, 오려송편은 햅쌀로 만든 송편이다.

 

송편은 원래 추석에만 먹는 음식은 아니었는데, 1670년 이익이 지은 성호사설에는 송편을 만드는 레시피가 나오는데, 현재처럼 떡 속에 콩가루 소를 넣고 솔잎을 까라고 쪄냈다고 한다. 경기도 구리지역에서는 송편을 나이떡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정월대보름(음력 1월 15일)에 이삭을 단 장대를 대문간에 세웠다가 중화절(음력 2월 1일)에 그 이삭으로 송편을 빚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송편을 머슴에게 나이 수만큼 나눠주고 하루 휴일을 제공했다고 하는데, 이는 농사의 시작을 앞두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머슴에게 사기를 불어넣는 차원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