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법무부는 14회 변호사시험(변시) 합격자를 1,744명으로 결정했는데, 대한변호사협회(변협)가 적정하다고 생각하는 수준(1,200명 이내)에 비해 +500명 이상 많았다. 지난 6년간 변시 합격자 수는 다음과 같이 1,700여명대를 꾸준히 유지하면서, 53% 안팎의 합격률을 보이고 있다.
2020년(9회) : 1,768명
2021년(10회) : 1,706명
2022년(11회) : 1,712명
2023년(12회) : 1,725명
2024년(13회) : 1,745명
2025년(14회) : 1,744명(합격률 52.27%)
양면의 문제를 가졌던, 사법고시
고시(考試)는 임용·자격 취득을 위해 실시하는 시험으로, 대표적으로 사법고시·행정고시·외무고시로 불리는 시험이 있었다. 대학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고시의 한자를 고(高, 높을)로 알았었다.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고(考, 생각할)라는 단어에서 시험이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느꼈다.
2017년 사법시험이 완전히 폐지되었고, 2019년 헌법재판소는 사법시험의 폐지를 합헌이라 판시했다. 사법시험은 극소수가 합격할 수 있는 어려운 고시로, 수많은 청년들이 청춘을 걸고 장기간 매달리게 되는데, 대부분의 수험생들은 탈락을 거듭하면서 고시낭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낭인(浪人)은 일정한 직업이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빈둥빈둥 노는 사람을 의미한다. 여러 방송에서는 신림동·노량진 고시촌에서 10년 이상(길게는 40~50년) 지내면서 사회생활 기회를 잃은 이들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과 인간관계(특히 가족)의 고충을 엿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시낭인은 누적되고, 우수한 인재들이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못함에 따라 심각한 사회적 인력손실을 가져 온다. 오로지 공부에만 열중하다가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들도 문제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사회경험이 없는 사법시험 합격자가 사회의 복잡한 현실을 다룰만한 실무역량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현실적인 실무역량을 갖춘 법조인 양성을 위해 도입된 제도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이다. 학사 중심의 법조인을 키우는 것이다.
50년 이상 지속된, 사법시험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실시된 최초의 법조인 선발시험은 조선변호사시험이었으며, 1950년부터는 고등고시 사법과가 시행되었다. 1963년 사법시험령(1963년) 제정으로 시행된 사법시험(司法試驗)은 2017년(제59회)까지 50년 이상 시행되었다. 초기의 사법시험은 절대평가 방식으로, 합격정원 없이 평균 60점 이상이면 합격이었다. 시험난이도가 어려웠던 해에는 5명 내외의 극소수 합격자가 나오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합격자는 임용(판사·검사)되었다. 1971년 사법연수원이 설립되기 전까지, 합격자는 서울대 사법대학원에서 연수를 받았다.
1978년 합격자가 100명을 넘어섰고, 1981년(제23회)부터는 합격정원을 300명으로 정했다. 서울대 법대 82학번(현역 1963년생)의 입학정원은 360명 가량으로, 81학번부터 도입된 졸업정원제로 인해 정원이 +80명 정도 증원되었다. 당시 82학번은 무리지어 다녀서 어디서든 눈에 띈다고 하여, 똥파리라는 별명이 있었다. 사회에서도 그들의 집단적 존재감을 부각되었는데, 대표적인 서울대 법대 82학번은 다음과 같다.
나경원·원희룡·조국·최상목·조해진·김난도·김상현·오재성·정태상·이원우
이후 사법시험 합격자 수는 점진적으로 증가하다가, 2000년대 초반 1,000명 수준이 되었다. 2007년 법학전문대학원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사법시험과 변호사시험(로스쿨) 제도를 병행하는 과도기를 가졌다. 2009년 로스쿨이 개원한 이후에도 2017년(2016년 1차, 2017년 2차)까지 사법시험은 유지되었는데, 이는 기존의 사법시험 준비생을 위한 배려였다. 다음과 같이 사법시험 합격자 수를 계속해서 줄여 나갔기에, 응시생들의 마음은 더욱 조급했을 것이다.
2012년 500명
2013년 300명
2014년 200명
2015년 150명
2016년 100명
2017년 55명
2018년부터는 모든 법조인 선발을 로스쿨 졸업 후 변호사시험 체계로 전면 일원화되었다.
신군부의 실패, 교육개혁
1945년 광복 직후부터 대입전형에 본고사(대학별 단독시험)가 도입되었는데, 각 대학에서 자율적으로 실시했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던 만큼 지원자 부족과 정원미달이 빈번했고, 입시부정도 많았다. 1954년 본고사를 치를 수 있는 자격시험(국가연합고사)이 도입되었지만, 입시혼란만 가중한 채로 다음 해에 폐지된다. 1955년부터 본고사가 본격적으로 정착되면서, 대입의 표준방식이 되었다. 1969학년도에는 다음과 같이 2단계 전형이 도입되면서, 예비고사 합격생만 대학별 본고사를 치를 수 있었다.
대학입학 예비고사 : 1차 시험
대학별 본고사 : 2차 시험
1980년 신군부는 재수생 급증 문제와 대학교육의 비효율을 해결하고자 했고, 7월 30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7·30 교육개혁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대학본고사 폐지, 졸업정원제 실시, 그리고 예비고사·고교내신성적 만으로 대입전형 실시였다. 1981학년도 대입에서는 선발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예비고사 : 50% 이상
내신성적 : 20% 이상
대학재량 : 30% 이내(예비고사·내신)
참고로 1982년도부터 예비고사의 명칭이 학력고사로 변경되었다. 1980년 이전까지는 대학은 입학정원제였다. 졸업정원을 기준으로 학교마다 입학자를 30% 이상 추가적으로 선발한 뒤, 학생의 일정비율을 학업성취·성적에 기반하여 탈락시키는 구조였다. 당시 정부가 내건 슬로건이 다음과 같았는데, 선진국(특히 미국) 대학들이 졸업요건을 엄격히 하면서 우수인재를 배출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입학 문은 넓게, 졸업 문은 좁게
1981년부터 대학입학 정원이 전년 대비 +7~10만 명 늘어나면서, 대학신입생 수가 크게 늘었다. 1981학년도 서울대 입시에서는 정원미달·눈치작전이 펼쳐졌고, 예비고사 저득점자도 상당수 합격했다. 또한 신입생이 졸업정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대학도 있었으니, 혼란 그 자체였다. 성적 하위 30%가 탈락하는 시스템은 학생 간의 극심한 경쟁·불신을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 중도탈락에 대한 불안감이 심했으며, 일부 학생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었다.
졸업정원제 부작용이 지속되자, 1988년 입학정원제로 원복하면서 졸업정원제는 7년 만에 사라졌다. KBS 드라마 첫사랑에서 이효경(이승연 분)은 대학입시에 실패한 재수생이었는데, 1960년대 중반 출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1982~1983년 입시를 치르지 않았나 싶다. 이효경의 극적 상황은 혼란스러웠던 당시의 입시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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