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용산구는 조선 후기 한양 5부 43방 중에서 용산방(서부)와 둔지방(남부)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만초천이 용산방·둔지방의 경계였다. 만초천의 서쪽 용산방에는 용산(龍山)이 있었고, 동쪽 둔지방에는 둔지산(屯之山)이 있다. 1876년 개항 직후에는 일본인들의 국내 거주가 엄격히 제한되었지만, 1882년 제물포조약이 체결되면서 개시장이 허용되었다. 개시장(開市場)은 내륙에서 외국인의 상업활동을 허용한 것으로, 한성 인근에서는 양화진이 개시장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좁은 양화진을 대체할 공간을 요구했고, 남대문까지 수레가 다니기 좋은 용산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한강을 가로지르는 주된 인프라는 다리이지만, 과거에는 뱃길을 잇는 3대 나루터(송파진·한강진·양화진)였다. 양화진(楊花津, 버드나무꽃이 피는 나루) 근처 들판에 형성된 마을을 양평(楊坪)이라 불렀다. 대부분이 농지·모래밭이었던 양평은 일제의 공업화 정책에 따라 공장지대(섬유·식료품·음료)로 변모했고, 서울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다시 주거·상업·업무지역으로 바뀌게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은 남산의 남쪽(용산)을 수용하였는데, 신용산(군용지, 일본인 거주지역)을 개발하기 위함이었다. 둔지방의 서쪽은 신용산이 되었고, 둔지산 일대가 군용지가 되었다. 둔지산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은 현재의 용산가족공원 자리로 이주했다가, 1917년 일본군 기지 확장에 따라서 다시 보광리로 이주했다. 당시 조선인들에게 문제는 이주 보다는 분묘였을 것이다. 조선인에게 분묘이전은 아주 예민한 문제였는데, 조선시대 민사소송의 대부분은 묘와 관련된 사건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무력 앞에 조선인의 주장은 무기력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동안 한성 내의 산지는 벌목·채석·투장이 일체 금지되었기에, 도성 내의 주검들은 광희문을 빠져 나가서 서쪽으로 돌아 남산 기슭에 묻었다. 광희문은 시구문, 남산은 북망산이라 불렸다.
일제강점기 고소득자 밀집지역, 신용산
신용산 내 민간인 거주구역을 원정(元町, 모토마치)라 붙였는데, 이는 일본인들의 으뜸가는 동네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도성 내의 본정(本町, 혼마치)와 비교하여 지어진 것이다. 1946년 10월 가로명제정위원회는 서울시내 충무로·을지로·원효로 등의 이름을 지었는데, 원효로는 원(원정)과 효(효창원)이 합쳐진 이름이다. 개인적으로는 원효대사와 연관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제과회사 중에는 본사·공장는 본토에 둔 채, 경성에 판매대리점을 두기도 했다. 대표적인 기업이 1899년 설립된 삼영(森永, 모리나가)제과와 1916년 세워진 명치(明治, 메이지)제과이다. 반면 다음 8개의 제과업체는 경성부에 본사·공장을 두고 있었는데, 모두 신용산에 위치했었다.
영강제과 : 남영동(해태제과 모태)
풍국제과 : 삼각지(동양제과 모태)
경성제과 : 갈월동
장곡제과 : 후암동
대서제과 : 용문동
궁본제과 : 용산경찰서 앞
기린제과 : 공덕동
조선제과
이전 글 <일제가 들여온 주전부리, 빵집>에서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전통적인 주전부리(떡·약과류)가 점차 서구식 빵·양과자 내지 일본식 화과자·사탕들로 대체되었다고 언급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과자수요의 대부분은 군부대와 소득수준이 높은 일본인이었는데, 이에 제과업체들은 생산시설과 본사를 신용산에 둘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철도시설(용산역)으로 통해 제품을 전국적으로 유통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당시 교통수단은 과자를 배달시켜 먹기에는 너무 큰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적산을 불하받은 제과회사들은 자연스럽게 용산에서 기반을 닦았는데, 과거 제과업계 3사(롯데제과·오리온·크라운해태)의 본사는 용산에 위치했던 적이 있었다.
일부 제과업체는 일본군에 양갱과 카라멜을 납품했다고 하는데, 완전히 수긍되는 부분이다. 군대 내에서는 주식보다 부식(과자·빵·냉동식품 등)이 사기진작에 큰 도움이 되는데, 개인적으로 선임들이 자기 돈으로 부식추진을 해줬던 기억이 고맙게 남아 있다. 1999년 12월 이등병 시절, 어둑한 막사 뒤에서 급하게 롯데샌드 파인애플을 털어 넣고 우걱우걱 씹어 먹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시장이 반찬이고, 고립감은 당(sugar)에 대한 욕망을 극대화시킨다.
과자와 라면을 공략한, 롯데
1967년 신격호는 갈월동(서울 용산구)에 자본금 3,000만원으로 롯데제과를 설립했다. 롯데는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여주인공 샤롯데에서 비롯되었는데, 샤롯데처럼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우면서 친숙한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되겠다는 염원을 담았다. 롯데제과는 초기에 6종의 껌을 출시하였는데, 당시에는 1956년부터 껌을 출시한 해태제과가 시장을 선점하고 있었다.
1969년 롯데제과가 양평동 공장이 세운 후에, 본사도 양평동으로 이전했다. 당시 양평동은 서울 인근의 대표적인 공장지대로, 해태제과의 공장도 양평동에 있었다. 이전 글 <공주댁 근처의 공간, 소공동>에서는 박정희 정부에서 신격호가 국내재벌로 자리잡게 되는 계기가 의외로, 1970년 롯데제과의 껌에서 검출된 쇳가루 모래가루였다고 언급했었다. 1972년 3종의 껌(쥬시후레시·후레시민트·스피아민트)를 출시하면서 시장점유율을 높였다. 참고로 롯데는 1976년 롯데자이언트(실업야구단)을 창단했다.
신격호가 롯데제과를 설립하기 2년 전인 1965년, 일본 롯데에서 일하던 신춘호(신격호 동생)은 롯데공업(현 농심)을 설립했다. 1966년 롯데공업은 롯데라면을 최초로 생산·출시한 후, 1975년 두번째 상품인 농심라면을 출시했다. 농심라면 포장은 의좋은 형제 설화를 모티브로 디자인했으며, 당시 유명 코미디언(구봉서·곽규성)이 출연한 TV광고로 인기를 얻었다. 1978년 롯데그룹에서 분리된 롯데공업은 사명을 농심으로 변경하게 된다. 참고로 국내 최초의 라면은 1963년 출시된 삼양라면이다. 이전 글 <포화와 불포화의 영역, 기름>에서는 1989년 발생한 삼양라면의 우지파동에 대해 언급했었는데, 면을 공업용 쇠기름(소기름)으로 튀긴 사건이다.
사업다각화로 호된 경험한, 크라운해태
과자를 먹으면서 제조업체까지 따지지는 않았지만, 수십년을 먹다보면 대충은 알게된다. 다음은 개인적인 선호가 반영된 제과회사별 대표상품이다.
롯데 : 가나초콜립, 빼빼로, 칸쵸, 제크, 칙촉, 마가렛트, 몽쉘, 코깔콘, 자일리톨껌, 월드콘, 죠스바
오리온 : 초코파이, 오징어땅콩, 고래밥, 스윙칩, 마이구미
해태 : 오예스, 에이스, 허니버터칩, 후렌치파이, 연양갱, 자유시간
크라운 크라운산도, 죠리퐁, 빅파이, 초코하임, 버터와플, 쿠크다스, 콘칩, 마이쮸
1945년 광복 직후 4명의 사업가는 적산 영강(永岡, 나가오카)제과 남영동 공장을 인수하여, 해태제과합명회사를 설립했다. 흔히들 국내 최초의 민족자본 식품회사로 해태제과를 꼽는데, 이미 1947년에 웨하스를 출시했다. 1958년 사업확장을 위해 해태산업을 설립하여, 1970년대 다양한 분야(식품·음료·관광·무역·전자 등)으로 진출하면서 외형을 키웠다. 하지만 무리한 사업확장과 이를 위한 계열사 난립은 재무구조의 악화를 가져왔고, 결국 1997년 채무불이행을 선언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해태그룹 내 주요 자산·계열사는 매각되었고, 2005년 크라운제과에 인수되면서 크라운해태가 되었다.
1947년 윤태현은 중림동(서울 서대문구)에 영일당제과소를 설립·운영하다가, 1956년 크라운제과로 상호명을 변경했다. 1968년 법인으로 전환한 후, 1969년 묵동(서울 중랑구)에 제1공장을 설립하고 본사를 이전했다. 묵동(墨洞, 먹골)은 과거 먹을 제조하던 지역으로, 조선시대 송계원(松溪院, 국립여관)이 위치하여 송계동이라고도 불렀다. 1988년 여러 계열사(크라운스낵·크라운베이커리·크라운엔지니어링 등)을 설립하면서 사업다각화에 나섰는데, 당시 유행처럼 건설업에도 진출했다. 결국 1997년 크라운제과도 화의신청을 했지만, 신속한 구조조정으로 재기가 가능했다. 2005년 크라운제과는 해태제과식품을 인수한 후, 남영동(서울 용산구) 해태사옥을 크라운해태 본사로 쓰고 있다.
오랫 동안 국민과자로 인식되어 온 새우깡(농심)은 라면을 주력하는 식품회사의 제품으로, 그 만큼 수 많은 기업들이 소비자의 미각을 자극·감동시키는 과자를 많이 만들어 왔다. 과거 묵동은 크라운제과 공장에서 풍겨 나오는 크라운산도 향이 그득했다고 하는데, 마치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과자로 만든 집이 떠올리게 된다. 달콤한 과자냄새를 한번쯤 맡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계속 맡다보면 얼마나 곤욕이었을까. 1999년 크라운제과 본사가 서초동(우성아파트 사거리)으로 이전하면서, 묵동부지는 아파트(묵동아이파크)가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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