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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역사/서울] 지금과는 딴판, 왕십리·마장동

by Spacewizard 2025.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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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2층 양옥에 살던 시절, 거실과 분리되었던 주방에는 연탄보일러가 있었다. 어머니는 수시로 연탄집게로 연탄을 집어서 새로운 연탄을 올리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연탄은 요리 뿐만 아니라 겨울철 난방을 제공하던 소중한 자원이었다. 겨울철 거리에 눈이 쌓일때면, 다 쓴 연탄을 부숴서 연탄가루를 눈 위에 뿌렸던 기억도 난다.

 

이전 글 <반복되는 부실의 역사, 아파트>에서는 해방 이후 김수근은 삼국석탄공업(三國石炭工業, 미쿠니석탄공업)을 불하받아서, 1947년 대구 칠성동에 대성산업공사를 설립했다고 언급했다. 1959년 서울 자회사(대성연탄)를 설립한 후 왕십리연탄공장(마장동)을 준공했는데, 연탄공장(현 마장삼성아파트)와 저탄장(현 대성유니드아파트)는 과거 미쿠니석탄공업 공장이 있던 자리였다. 산업성장기 저탄장을 철로 가까이에 두었는데, 이는 석탄을 신속히 선적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왕십리역-청량리역 구간은 군사용이었으며, 그 철도 옆에 대성연탄이 있었다.

 

과거 에너지 클러스터였던 마장동에는 대성연탄공장·발전소·고려가스공업이 밀집해 있었고, 배후에서 석탄·시멘트 등을 하역하던 공간이 왕십리역이었다. 연탄공장이 질병(진폐증)을 유발하는 혐오시설로 인식되면서, 연탄공장과 저탄장 부지에는 아파트가 세워진 것이다.

1980년대 왕십리/마장동 토지용도 [출처:카카오맵]

불하받은 연탄회사, 대성

 

대성산업공사는 국내 최초의 연탄회사였다. 창업 초기에는 석탄을 트럭으로 구매하여 일일이 수작업으로 연탄을 생산했다고 했지만, 한국전쟁 이후 연탄을 대량생산하면서 급성장했다. 1968년 설립된 대성산업는 계열사들 흡수합병한 후, 1976년 기업을 공개했다. 1970년대 오일쇼크(1973년·1978년)를 겪으면서 대구도시가스를 설립한 후, 서울도시가스를 인수했다.

 

1935년 설립된 삼국석탄공업(三國石炭工業, 미쿠니석탄공업)석탄을 원료로 하는 가공연료품(연탄)을 생산하고, 중국 등지에 석탄·석유를 수출하는 회사였다. 일본의 국책기업으로 분류된 미쿠니석탄공업은 전쟁수행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였고,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 조선인 엘리트가 입사할 정도로 위상이 높았다. 이전 글 <서울 최초의 특성화고, 선린>에서는 1906년 관립농상학교에서 상과가 독립되면서, 사립선린상업학교가 분화되었다고 언급했었다. 대구상업학교(현 대구상고)를 중퇴한 김수근은 7년 간(1932~1939년) 삼국석탄공사 대구지점에서 사환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었고, 이후 대성산업공사를 설립한 것이다. 1935년 미쿠니 상회는 조선 최초의 아파트를 시공·분양했는데, 일제강점기 상회(商會)는 단순히 잡화점 수준이 아니라 다양한 사업을 전개한 대기업이었다.

 

경제성장기 산업지대, 왕십리·마장동

 

1980년대까지도 왕십리·마장동 일대에는 연탄공장 외에도 마찌꼬방·미군부대·변전소·도축장·우시장 등이 있었다. 1970년대 산업지대였던 왕십리에는 지방에서 상경한 이주민들이 많았고, 골목 곳곳에 마찌꼬방이 생겨났다. 일본어 마치코바(まちこうば, 町工場)에서 유래한 마찌꼬방은 주택가에 자리한 작은 작업장으로, 다양한 분야(금속가공·기계·봉제·인쇄 등)의 소규모 수공업이 이뤄졌다.

 

왕십리 미군부대는 주로 군사연료의 저장·보급을 위한 저유소로 활용되었는데, 현재의 성동구청과 왕십리역 일대에 위치했었다. 미국으로 반환받은 부지는 대대적인 재개발이 이루어졌다. 2004년 성동구의 종합행정타운(성동구청·성동구의회·교육청 등)이 들어섰고, 2008년에는 왕십리민자역사가 완공되었다. 미군부대 근처에는 동대문에서 뚝섬까지 이어지는 기동차 선로가 지나다니는 샛길이 있었으며, 그 샛길 양쪽으로 미군부대 철조망이 높게 쳐 있었다. 기동차는 단선의 궤도차로, 동대문을 기점으로 청계천변을 끼고 달리다가 뚝섬까지 운행되었다. 철거비를 줄이기 위해 그 위에 아스팔트를 깔았다고 한다.

 

왕십리변전소는 1961년 세워진 디젤발전소(왕십리내연발전소)에서 시작하였는데, 1969년 디젤발전기 일부를 여수내연발전소로 이설했다. 이후 왕십리내연발전소는 비상상황이나 첨두부하(전력피크)가 발생 시에 서울지역에 비상전력을 긴급히 공급하는 비상용 발전소로 기능해왔다. 2000년대 들어 한전의 시설 현대화 정책의 일환으로 왕십리내연발전소 발전시설의 철거와 함께 변전시설로 전환되었는데, 2007년 왕십리변전소가 준공된 것이다.

 

왕십리변전소 옆에는 한전 서울본부 마장물류센터가 위치하고 있는데, 과거 자재적치장의 용도로도 활용되었다. 2020년 김포 경인물류센터가 완공되면서, 마장물류센터의 기능이 김포로 이전되었다. 현재 마장물류센터는 공실로 유지되고 있다. 2021년 마장역세권 지구단위계획 구역 및 계획 결정고시에 따라, 변전소와 마장물류센터 부지가 특별계획구역으로 지정되었으며, 향후 변전소 지하화 및 복합개발(주거·판매·업무·공공시설 등)이 추진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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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설 흥분 버튼, 우시장

 

대학시절 취업한 선배들이 소고기를 쏘는 날이면, 흥분한 마음으로 찾았던 공간이 마장동먹자골목이었다. 20~30년 전만 하더라도 소고기의 다양한 특수부위를 저렴하게 먹을 수 있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도축장·청계천변 일대의 도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노점상들을 국공유지로 이주시켰고, 지금까지 무허가건물에서 영업을 해오고 있다. 당시 마장동먹자골목 옆으로 이어지던 허름한 식당에서 거나하게 마셨던 소주맛을 잊을 수가 없는데, 주로 호남집 아니면 대구집을 갔었다. 지금은 과거에 비해 상점도 많이 줄고, 가격적인 메리트도 크게 와 닿지 않는다. 마장축산물시장은 국내 최대 규모의 축산물시장으로, 원래 도축장과 가축시장이 결합한 형태로 시작되었다.

 

1958년 숭인동(종로구)에 있던 가축시장이 마장동으로 이전한 후, 1963년 우성농역(우성산업 계열)이 도축장을 숭인동에서 마장동으로 이전했다. 농역(農役)은 농축산 관련 방역·위생·도축을 의미하는 용어로, 우성농역이 마장동 도축장 부지 및 관련 시설을 소유·운영했다. 도축장이 성황을 이루자, 자연스레 축산물을 판매하는 상점이 주변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1974년 가축시장이 폐장되자, 더 많은 상점이 밀집되면서 육류도소매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1994년 협진식품이 부도나기 전까지 서울시 내의 축산물도매회사는 다음 3개였다.

 

독산동 : 협진식품

마장동 : 우성농역

가락시장 : 축협서울공판장

 

사실 마장동에서는 돼지도 거래·도축했었지만, 소고기 유통이 중심이 되면서 우시장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양마장(養馬場, 말을 기르는 목장)이 있던 마장동이 마시장이 아닌 우시장이 된 것이다. 1998년 마장동 도축장이 폐장된 이후, 서울에서는 도축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주로 지방 도축장에서 도축된 축산물이 서울 시내의 축산물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다.

 

1994년 우성농역은 고려가스공업와 아파트 공동개발(지분비율 8:2)에 나섰는데, 우성농역 소유부지의 절반 이상(도축장 부지, 6,800평 가량)과 고려가스공업부지(3,300평 가량)를 시행한 것이다. 1998년 고려산업개발(시행사)은 현대아파트(현 청계현대아파트)를 준공했는데, 서울시가 도축장 이전·폐장과 함께 도시정비(아파트부지 전환)를 얼마나 신속히 진행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참고로 우성농역에서 개발한 아파트로는 우성에비뉴아파트(2개동, 60세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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