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역사적으로 여성이 왕이 될 수 없는 전통이 있었다. 12세기 여성 왕위계승자 마틸다(Empress Matilda)는 당시 귀족들의 반발로 왕위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1141년 통치권을 장악한 적 있다. 1553년 귀공녀(Lady) 제인 그레이(Jane Grey)가 9일 간 왕위에 올랐다가, 바로 폐위되었다. 1553년 즉위한 메리 1세(Mary I)는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의 정식 여왕으로, 잉글랜드·아일랜드를 통치했다. 이후 메리 이후의 여왕 계보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엘리자베스 1세(1558~1603년 재위) : 영국 르네상스
메리 2세(1689~1694년) : 남편(윌리엄 3세)와 공동통치
앤 여왕(1702~1714년) : 그레이크브리튼(영국-스코틀랜드 통합) 최초 통치
빅토리아 여왕(1837~1901년) : 64년 간 대영제국 최전성기 통치
엘리자베스 2세(1952~2022년) : 역대 최장기간(70년) 통치
현재 영국이라는 섬나라는 다음 4개 나라로 구성되는데, 아일랜드 공화국(구 남아일랜드)은 완전한 독립국이다.
잉글랜드(England)
웨일스(Wales)
스코틀랜드(Scotland)
북아일랜드(Northern Ireland)
켈트족을 배신한, 앵글로색슨
원래 영국은 유럽대륙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8,000년 전에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브리튼 제도(British Isles)라는 섬이 되었다. 4,000년 전 브리튼 섬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인도유럽어는 영어의 시초가 되었고, 고대인들은 가장 비옥했던 현재의 잉글랜드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43년경 로마는 그레이트브리튼섬(오른쪽 가장 큰 섬)을 침공했는데, 이는 비옥한 잉글랜드를 노린 것이다. 로마의 침공 당시 브리튼섬은 켈트족(Celtic, 셀틱)이 지배하고 있었다.
격렬히 저항하던 켈트족은 로마의 압도적인 무력·문화에 점차 감흥·동화되었다. 410년 쇠퇴한 로마제국은 브리튼을 철수하면서, 여러 부족들이 무주공산인 브리튼을 침략하게 된다. 특히 스코틀랜드의 사나운 종족들이 자주 쳐들어왔다. 이에 대항하여 켈트족은 유럽대륙의 용병을 고용하기로 했는데, 바로 앵글로색슨족(Anglo-Saxons)이었다.
하지만 막상 잉글랜드에 상륙한 앵글로색슨족은 비옥한 브리튼이 마음에 들었고, 오히려 켈트족을 몰아내고 잉글랜드(England, 앵글로색슨족의 땅)라고 명명한다. 패배한 켈트족은 웨일스·스코틀랜드·아일랜드섬으로 뿔뿔이 흩어졌으며, 이후 각 지역은 매우 폐쇄적인 생활을 하면서 각자의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 이 때가 영국이 4개 일파로 나뉜 시점이다.
게르만어군 : 영어
켈트어군 : 웨일스어·스코틀랜드어·아일랜드어
다이나믹 켈트족의 유산, 스포츠
켈트족은 갈리아(Gallia, Gaul) 지방에서 이주한 부족으로, 갈리아를 의미하는 켈트(Celt, 셀트)는 고대 그리스어 켈토이(Κελτοί)가 라틴어 켈타이(Celtae)를 거쳐 유래했다. 켈트족의 이름을 딴 스포츠구단으로는 3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글래스고 셀틱스(Glasgow Celtics) : 스코틀랜드 프로축구팀
보스턴 셀틱스(Boston Celtics) : 미국 프로농구팀
셀타 비고(Celta Vigo) : 스페인 프로축구팀
19세기 후반 많은 아일랜드인들이 글래스고(Glasgow, 스코틀랜드)와 보스톤(미국)으로 이주했는데, 아일랜드 대기근(Great Famine)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글래스고에서는 아일랜드 하층민들의 구제기금을 마련할 목적으로 만든 프로축구팀을 창설했는데, 켈트족들이 중심인 스코틀랜드인·아일랜드인의 정체성을 팀이름에 반영한 것이다. 보스톤 프로농구팀도 도시에 정착한 아일랜드인이 많다는 부분을 반영하여 지어졌다. 비고(Vigo)는 스페인 북부 갈리시아(Galicia, 켈트족의 땅) 지방의 소도시로, 과거 켈트족들은 갈리아의 서남쪽(스페인 북부)에도 많이 거주했었다.
공화를 향한 오랜 노력, 아일랜드
로마는 브리튼을 정복한 이후 아일랜드까지도 진출할 계획이었지만, 현실화되지는 못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일랜드섬(아일랜드 공화국, 북아일랜드)를 이우에르니아(Iouernia, Ierne)로 주로 불렀으며, 로마에서는 라틴어 히베르니아(Hibernia)라 지칭했다. 히베르니아는 라틴어 히엠스(Hiems, 겨울)에서 파생된 말로, 로마 입장에서는 북쪽의 추운 지역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당시 원주민(켈트인)들은 아일랜드를 에린(Erinn/Éireann)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아일랜드계 이주민 단체(은행·기업 포함)에서는 히베르니아를 사용하곤 한다.
16~17세기는 종교·정치적 갈등이 결부되던 시기였다. 17세기 울스터(아일랜드 북부)에는 잉글랜드·스코틀랜드에서 건너 온 개신교도(주로 프로테스탄트)가 에 대거 이주·정착했는데, 이들은 친영국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가 여전히 많았던 아일랜드 남서지역은 반영국(독립) 성향이 강했다. 1801년 연합법(Act of Union)이후, 아일랜드는 UK의 일부(행정구역)이 된다. 당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잉글랜드·스코틀랜드)과 아일랜드 왕국이 합병하면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이 결성되었다.
19세기 말부터 영국에서는 아일랜드에 대한 홈룰(Home Rule, 자치권) 논의가 있었으나, 북부의 유니오니스트(북아일랜드의 영국 잔류파)들은 영국 잔류를 원했다. 유니오니스트(Unionist)는 영국과의 정치적 통합을 지지하는 세력·사람이다. 공화(共和, republic, 함께 화합)은 여러 사람이 권리를 나눠 가지며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달리 말해 군주(한 사람)가 통치하지 않는 국가라고도 볼 수 있다. 1858년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IRB, Irish Republican Brotherhood)이 창립되면서, 아일랜드는 공화국 수립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1916년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들이 부활절 봉기(Easter Rising)를 일으키니 이후, 1919년부터 아일랜드 독립운동이 전면적으로 전개되었다.
1920년 영국 의회가 아일랜드 정부법(Government of Ireland Act)을 제정했고, 영국의 자치정부가 된 아일랜드는 다음과 같이 분할된다.
북아일랜드 : 6개 주
남아일랜드 : 26개 주
하지만 남아일랜드 민족주의자(신페인 중심)가 영국 제도를 거부하면서, 남아일랜드 자치정부는 정상적으로 출범하지 못했었다. 1921년 12월 앵글로·아일리쉬 조약(Anglo-Irish Treaty)이 체결되었고, 1922년부터 기존 남아일랜드 26개 주는 대영제국 도미넌스(Dominion, 자치령·영연방) 형태로 아이리쉬자유국(Irish Free State, 훗날 아일랜드 공화국)를 출범했다. 도미넌스은 영국 국왕을 국가원수로 두면서도 국가에 준하는 광범위한 자치권을 가지고, 당시 캐나다·호주·뉴질랜드도 도미넌스 체제였다. 북아일랜드도 조약 발효 후 1달 내에 옵션(자유국 잔류 내지 영국 잔류)을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 영국에 잔류했다.
1937년 아일랜드 자유국은 신헌법 채택하면서, 국호를 아일랜드(Ireland, Éire)로 공식화했다. 이 때 총독직을 폐지하고 대통령을 국가원수로 하는 의원내각제를 도입했다. 1948년 아일랜드공화국법(Republic of Ireland Act)에 따라 완전한 독립국이 되는데, 영국 국왕의 모든 지위를 공식적으로 박탈하면서 영연방을 탈퇴했다. 영국과 아일랜드와의 갈등은 1920년 초반에 심했으며, 1937~1948년은 아일랜드 공화국이 영국과 거리를 두면서 완전한 독립을 준비하던 시기로 볼 수 있다. 북아일랜드는 영국 잔류를 선언하면서 영국령이 되었다. 아일랜드의 남북 분단이 확정된 것이다.
이후 북아일랜드 내에서도 여전히 종교적 분파가 남아서 갈등이 지속되고 있었다.
가톨릭(친아일랜드) : 공화주의자
프로테스탄트(친영국) : 유니오니스트
1960년대 말부터 30년 가량 내전적 폭력사태가 계속되었는데, 바로 트러블즈(The Troubles)이다. 1998년 굿 프라이데이 협정(Good Friday Agreement)이 벨파스트(북아일랜드 수도)에서 체결되었고, 국민투표를 통해 북아일랜드는 영국의 일부로 남게 되었다. 벨파스트 협정은 분쟁의 종식과 평화의 제도화라는 측면에서 국제사회에 시사한 바가 컸고, 한반도 평화모델로도 제시된 바 있다.
1592년 엘리자베스 1세는 트리니티 칼리지(아일랜드 명문대)를 설립했고, 19세기 아일랜드 대기근 시기 빅토리아 여왕은 아일랜드를 수 차례 방문했다. 2011년 엘리자베스 2세는 아일랜드를 3박 4일 일정으로 공식방문했는데, 이는 1911년 조지 5세가 방문한 이후 딱 100년 만의 방문이었다. 영국 국왕이 1세기 동안 아일랜드를 방문하지 못한 이유는 식민지 시절부터 이어 온 반영국 정서 때문이었을 것이다. 벨파스트 협정 이후 화해무드가 조성되고, 여왕의 방문 이후에는 2014년 마이클 히긴스(아일랜드 대통령)가 영국국빈으로 방문했다. 한일관계보다 식민지 시절과 독립투쟁이 길었던 만큼, 화해의 시간도 길고 쉽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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