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혁명(1789~1799)은 절대왕정의 압제와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맞서 민중이 스스로 주권을 쟁취한 시민혁명이다. 200년이 지난 21세기 프랑스에서 폭동이 일어나는 배경과 프랑스 대혁명의 배경이 크게 다르지 않다. 재정위기가 있었고, 서민들은 신분차별과 생활고에 시달렸다. 대혁명 당시 프랑스 사회는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이라는 불평등 신분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전체 인구의 2%에 불과한 성직자(제1신분)와 귀족(제2신분)이 대부분의 토지를 차지하면서 면세특권도 있었다. 인구의 98%(평민, 제3신분)은 정치적 권리 없이, 세금부담을 안고 있었다.
프랑스 왕실은 사치적이었고, 미국 독립혁명을 지원하고 있었다. 이렇게 고갈된 국가재정은 대혁명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설상가상 1788년 최악의 가뭄·기근이 겹치면서 빵 가격이 폭등했고, 굶어 죽기 직전에 처한 서민들은 분노를 드러낼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계몽주의(루소·볼테르 등)가 부르주아(시민계급)에 퍼지면서, 지배층의 권위에 의문을 품게 된다. 루이 16세는 재정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증세가 필요했고, 1789년 6월 귀족들에게도 세금을 걷기 위해 테니스코트에서 삼부회(Three Estates, 신분별 대표회의)를 소집했다. 삼부회의 표결 방식이 평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제3신분 대표들은 별도로 <국민의회>를 결성했다. 헌법제정을 요구하면서, 해산을 거부했다.
1789년 7월 14일(현 혁명기념일) 국왕이 군대를 통해 국민의회를 압박하자, 분노한 파리 시민들이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바스티유 감옥은 왕권의 압제와 독재의 상징이었다. 1789년 8월 국민의회는 <프랑스 인권선언>을 발표했는데, 이는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그 권리는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혁명에 반대하는 주변국 군대와의 전쟁이 터지고 왕실이 오스트리아와 내통하려다 들통나면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선포되었다. 국왕·왕비은 기요틴에서 처형된다.
로베스피에르는 혁명 수호라는 명목 하에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처형했고, 국민들은 공포정치에 지쳐갔다. 179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대혁명은 막을 내린다. 나폴레옹은 대혁명의 핵심유산인 <신분제 철폐(평등)>에는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이를 전 유럽에 확산시켰지만, 민주주의(자유·공화정)는 거부하면서 스스로 독재의 길을 택했다. 신분제 폐지로 상공업에 종사하는 시민(부르주아)이 새로운 사회주역으로 부상했고, 이는 자본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프랑스에서는 보통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유럽 최초의 보통선거이다. 이 선거에서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조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지만, 친위쿠데타를 일으키면서 황제(나폴레옹 3세)가 되었다.
나폴레옹 3세가 전쟁에서 패한 후 물러났고, 1870년 제3공화국이 등장했다. 1875년 헌법이 제정되었고, 이후 의회정치·내각책임제를 바탕으로 한 현대 프랑스 민주주의의 뼈대가 자리잡았다. 프랑스 국기의 3가지 컬러(파랑·흰색·빨강)은 근대 시민사회의 핵심가치를 의미하는데, 자유·평등·우애이다.
'역사·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도시] 군부대 야산, 위례 (0) | 2026.10.15 |
|---|---|
| [역사] 방호산을 막아 낸, 마산 (0) | 2026.10.15 |
| [역사] 방배/수서의 흔적, 왕족 (0) | 2026.10.13 |
| [도시] 피리 부는 마을, 상적동 (0) | 2026.10.11 |
| [역사] 진화의 치유, 매달리기 (0) | 2026.10.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