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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역사] 방배/수서의 흔적, 왕족

by Spacewizard 2026.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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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위계승에서 동생이 형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적이 있다. 월산대군이 동생(자을산군, 훗날 성종)에게 왕위를 뺏겼듯, 그 전에는 효령대군는 동생(충녕대군, 훗날 세종)에게 왕위를 뺏긴 적이 있다. 형제 간의 왕위계승권은 그 시절 왕가의 큰 어른과 권신들이 정한다고 볼 수 있다. 효령대군(이보)은 불교에 귀의한 후 91세까지 장수한 인물로, 방배동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방배역(지하철 2호선) 근처에 효령대군의 묘역과 사당(청권사)이 있다. 청권(淸權, 맑은 권세)은 공자가 중국 주나라의 태백·우중을 칭찬한 말로,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한 덕을 칭송한 것이다. 방배역 인근 도로명은 <효령로>이다. 불교에 심취했던 효령대군은 조카(세조)의 정당성을 세워주기 위해 노력했다. 

 

수양대군은 대군 시절부터 불경번역사업을 주도했다. 1440년대 후반 훈민정음이 창제된 직후, 세종의 명으로 최초의 불교 한글서적을 남겼다. 1447년(세종 29) 석보상절은 소헌왕후(세종 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경을 한글로 번역한 책으로, 세종은 이를 읽고 감동하여 원인청강지곡(찬불가)을 지었다고 한다. 1459년(세조 5) 월인석보는 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을 병합·수정한 한글불교총서이다. 1461년(세조 7) 세조는 간경도감(불경번역 관청)을 설치하여 대대적인 불경번역을 수행했는데, 여기에 참여한 주요인물이 효령대군·신미대사·한계희 등이다.

 

1462년(세조 8) : 능엄경
1463년(세조 9) : 법화경
1464년(세조 10) : 금강경언해, 반야심경언해
1465년(세조 11) : 원각경언해

 

효령대군이 개최한 법회에서 사리가 분신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후 세조는 이를 기리기 위해 직접 원각경언해 번역에 참여했다. 세조가 원각사를 창건할 당시, 효령대군은 조성도감의 도제조(총책임자)를 맡았다. 석탑 내에는 분신사리와 효령대군이 직접 베껴 쓴 <원각경>을 안치했다.

 

광평대군(이여)은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의 5남으로, 1444년 20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광평대군이 세상을 떠날 당시 생후 5개월된 외아들(영순군)만 남았음에도, 전주이씨 파종회 중 가장 후손이 번창한 가문으로 남았다. 영순군이 3군(三君)을 두었고, 이 삼형제로부터 7개의 지파가 갈라져 나왔다. 수서역 인근의 대모산 자락에는 광평대군파(700여기) 묘역이 넓게 자리하고 있으며, 일원역·수서역을 잇는 도로명이 <광평로>이다. 무안대군(이방번, 태조 7남)의 묘도 있는데, 이는 광평대군이 무안대군의 제사를 잇는 봉사손으로 입적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왕족은 시간이 흘러 촌수가 멀어지면, 과거를 통해 스스로의 능력을 입증해야 했다. 광평대군 가문에서는 수십명의 과거급제자가 배출되었고, 그 중에는 영의정을 지낸 이유가 있다.

 

광평대군 묘소는 원래 선릉(현 삼성동)이었으나, 1495년(연산군 1년) 성종의 능을 조성하기 위해 대모산 자락으로 이장했다. 당시 연산군은 영순군 가문이 번창하지 못할까봐 우려했지만, 지관들은 천하제일의 명당으로 평가했다. 왕가의 무덤과 대군 종가의 재실(숭모재)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궁말(궁마을)>로 불렸는데, 근처 먹자골목이 있다. 수서동 아파트 단지 개발 과정에서 봉헌사지로 추정되는 공간이 발견되었는데, 봉헌사(奉獻寺)는 헌릉(태종·원경왕후 능)의 원당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절을 축조·유지보수하기 위해 국가에서 운영하던 기와가마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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