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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역사] 동대문의 가짜 산, 조산

by Spacewizard 2026.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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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성은 대변(똥)으로 인한 위생문제가 많았을 것인데, 그 배경에는 도성 내 농사금지령과 급증한 인구에 있었. 농경지에서는 대변을 퇴비로 소비되었지만, 도시에서는 어디엔가 버려져야 했다. 18세기 한성 인구는 20만명을 넘어서면서, 조선 초(10만명) 대비 2배를 넘어섰다. 공공화장실·하수처리시설이 없던 한성은 도로·골목·개천 곳곳이 말 그대로 똥천지였을 것이다. 실제 한성 토양에서는 많은 기생충알이 발견될 정도로 오염도가 높았다고 하니, 수인성 전염병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80년대에도 가끔 도로에서 인분을 볼 수 있었으니, 조선시대는 오죽 했으랴.

 

1751년(영조 27) 영조는 육조 앞으로 불법민가가 들어선 모습을 보고는, 인민(백성)이 너무 많다고 한탄했다. 인구 증가는 필연적으로 인분·쓰레기가 쏟아냈고, 개천(청계천) 바닥은 버려진 분뇨·쓰레기로 높아져 있었다. 오간수문(五間水門)은 한성의 동쪽 성벽 아래에 설치한 5칸짜리 수문으로, 개천의 총배수구 역할을 했다. 한성에서 관군에게 쫒긴 임꺽정이 오간수문의 철창을 부수고 도성 밖으로 탈출했다는 일화도 있다. 영조대 오간수문의 5개 구멍은 이미 모두 막힌 상태였다. 개천의 높은 바닥과 막힌 배출구는 범람하기 쉬운 조건이었고, 범람한 오수는 전염병의 위험을 키웠다. 결국 영조는 준천(청계천 준설사업)을 통해 한성의 배수기능을 되찾고자 했다. 일제는 오간수문 자리에는 오간수교(五間水橋)가 설치하여 철교로 이용했고, 1926년 오간수교는 폭을 확장했다. 순종의 장례행렬이 지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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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대 준천 과정에서 나온 막대한 양의 오물 섞인 토사·자갈이 퍼내졌고, 그걸로 오간수문 주변에 10~15m 높이의 조산((造山, 가짜 산)을 쌓았다고 한다. 당시 기술·예산로는 개천 바닥에서 파낸 막대한 양의 오물 섞인 토사·자갈을 도성 밖으로 운반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다. 조산은 개천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2군데 쌓았다.

 

청계천 남측 조산 : 방산시장 일대
청계천 북측 조산 : 동대문종합시장·종로6가 일대

 

주변 동네는 가산동·방산동으로 불렸는데, 방산(芳山, 꽃향기 나는 산)은 악취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지금의 방산시장은 과거의 조산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영조는 가산의 흙이 다시 개천으로 흘러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조산 주변의 민가 건립과 오물투기를 금지시켰다. 시간이 흘러 조산에도 나무와 풀이 자랐고, 한성주민이 도성을 조망하기 위해 오르기도 했다. 정월대보름에는 답교(다리밟기) 놀이를 즐긴 인파가 인근 가산에 올라 달맞이 놀이를 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현대판 난지도 하늘공원·노을공원이다.

 

일제강점기 경성의 근대화를 위한 부지 확보 차원에서 남측 가산을 평탄화하기 시작했고, 그 평지에 근대교육기관(경성사범학교·경성약학전문학교 등)이 들어 섰다. 해방 이후에는 대규모 시장이 형성되었는데, 오늘날의 방산시장(국내 최대 포장·인쇄·자재)이다. 남측 가산은 북측 가산에 비해 서쪽에 위치했는데, 이는 남산(목멱산)의 많은 지류들이 영향을 미쳤다. 남산에서 내려오는 지류가 본류와 만나는 합류부는 토사·오물이 대거 쌓이는 종착지였다. 또한 오간수문 남측은 조선 초부터 군사요충지로써 민가들이 밀집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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