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도시

[역사] 3개 성씨로 분리된, 기씨

by Spacewizard 2026. 10. 3.
반응형

행주기씨(幸州奇氏)는 행주 단일본만 존재하며, 그 유래는 고대(기자조선·마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위만의 침입으로 나라를 뺐기자, 기준(箕準, 기자 41세손)은 배를 타고 금마군(현 익산)으로 내려와 마한(馬韓)을 세웠다. 기훈(기준 7세손)은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들이 각각 다른 성씨를 사용하면서 그 시조가 되었다. 

 

기우성(奇友誠) : 덕양(행주) 기씨
기우량(奇友諒) : 청주 한씨(韓氏)
기우평(奇友平) : 태원(평양) 선우씨(鮮于氏)

 

같은 뿌리를 둔 3개의 성씨는 전통적으로 서로 혼인을 하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기우성은 백제(온조왕) 시중을 지냈는데, 당시 마한의 유민들이 온조왕에 의해 행주(현 고양시 덕양구 행주동 일대)로 이주했다. 행주산성 안에는 기가바위(奇哥岩)와 기감천(奇甘泉)이 남아 있다. 하지만 기우성 이후의 기록은 오랫동안 끊겼고, 고려 인종대 문하평장사를 지낸 기순우(奇純祐)를 중시조로 삼았다. 

 

기자오(기순우 4세손)의 막내딸은 기황후(원나라 마지막 왕후)가 되었는데, 기황후에게는 5명의 오빠(기식·기철·기원·기주·기륜)가 있었다. 1333년(충숙왕 복위2) 기황후는 원나라에 공녀로 보내졌는데, 고려 출신 환관(고용보·동만지)에 눈에 들어 황궁의 궁녀로 입성한다. 14살의 순제(토곤테무르)는 차를 따르는 기황후에게 마음을 빼았겼는데, 순제는 불과 3년 전인 1330년(고려 충혜왕 원년)에 대청도(大青島, 현 인천 옹진군 대청면)로 유배경험이 있었다. 엘 테무르가 명종(순제 부)을 암살하는 정변을 일으켰고, 이후 권력싸움에서 밀린 11살의 황태자가 유배를 온 것이다. 당시 순제가 살던 집터는 현재 대청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1년 반 동안의 고독한 유배생활은 소년 황태자의 마음에 고려에 대한 깊은 인상을 남겼고, 3년 후 고려여인에게서 향수와 친밀감을 느꼈을 것이다. 드라마 <기황후>에서 기승냥(기황후)과 타환(순제)가 대청도에서 로멘스를 키워가는 설정은 픽션(허구)인데, 기황후의 본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대청도는 고려 조정에서도 유배지로 많이 활용했다. 

 

순제가 기황후를 총애하자, 타나실리(제1황후)는 기황후를 가혹하게 학대했다. 1335년 타나실리의 친정가문이 역모로 멸문되고 타나실리도 사약을 받게 되었지만, 순제는 바얀의 반대로 기황후를 황후로 삼을 수 없었다. 1339년 기황후가 아들(아유실리다라)은 낳았고, 다음 해인 1340년 바얀이 숙청되면서 기황후는 제2황후로 책봉된다. 1340년 기황후가 총괄하는 자정원(資政院, 황실재정)이 설치된 이후, 기황후는 재물(돈)과 고려여인들을 활용하여 원나라 조정을 완전히 장악했다. 당시 원나라 고위관료 사이에서는 고려여인을 집안에 들이는 것이 유행이었으며, 기황후는 직접 선발한 여인들을 통해 정보라인을 구축었다. 자정원은 세금징수와 매관매직을 통해 막대한 자금을 쌓을 수 있었는데, 이 자금은 정략으로 사용되었다. 기근구율을 통해 민심을 샀으며, 황실 내부의 반대파에게 뇌물공세를 펼쳤다. 군비까지 제공하면서 군부의 지지도 얻었다. 기황후의 로비·정보 전략은 장기적으로 반대파를 무력화시켰으며, 결국 1353년 아들을 황태자에 등극시켰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