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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역사] 불안 속의 즉위, 영조

by Spacewizard 2026.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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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은 어머니(장희빈)의 사사를 목격한 이후 언제 사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신체적·정신적으로 쇠약했을 것이다. 1721년(경종 1) 연잉군(훗날 영조)이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된 후 대리청정까지 맡게 되는데, 그 배경에는 경종의 후사 부재와 병약함이 있었다. 33세에 즉위한 경종은 자식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노론은 매우 조급했다. 당시 노론·소론은 서로를 역적으로 모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노론은 장희빈(경종 모)를 사사한 주역이었기에, 경종에 의해 언제 숙청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노론은 안위보장을 위해 영조와 정치적 밀약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다. 1717년(숙종 43) 숙종은 이이명(노론 영수)와 정유독대(丁酉獨對)를 가졌는데, 조선시대 임금이 신하와 사적으로 독대하는 것은 국법상 금지된 행위였다. 정유독대에서 세자(경종)을 폐한 후 연잉군을 후사로 삼자는 교감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추정도 없지 않다. 숙종은 세자가 연산군처럼 피의 복수를 하지 않을까 걱정했고, 왕위를 이어 받기에는 병약한 상태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1721년 조성복(노론 하급관원)의 상소로 시작된 대리청정 요구가 수용되었지만, 경종은 준소(峻少, 높은 소론, 소론 강경파)의 상소(왕권능멸·역모)를 기회로 삼아 대리청정을 거두고 노론세력을 대거 숙청했다. 1722년(경종 2) 정권을 잡은 소론은 노론세력을 뿌리 뽑기 위해 <목호룡의 고변>을 이용했고, 이 고변으로 촉발된 신임사화로 노론가문이 멸문지화에 가까운 참변을 겪었다. 목호룡(지관, 노론가문 서자)는 노론세력이 경종을 시해하기 위해 다음 삼급수(三急手, 3가지 음모)를 꾸몄다고 고발했다.

 

대급수 : 칼로 왕을 찌르는 자객 투입
소급수 : 음식에 독을 타는 독살
평급수 : 숙종의 유서를 위조해 왕을 폐위

 

연잉군은 심임사화 역모의 배후로 꾸준히 지목되었지만, 경종은 동생을 보호했다. 1724년(경종 4) 경종은 몇일 간 심한 병치레로 식사를 못했는데, 연잉군은 형의 입맛을 위해 수라상에 게장·생감을 올렸다. 문제는 경종이 그 날 밤부터 복통·설사에 시달렸다는 점인데, 한의학에서 게·감은 배탈을 유발하는 음식조합이었다. 현대의학에서는 면역력이 없던 경종이 급성 식중독과 그로 인한 패혈증에 걸렸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경종이 사흘 내내 설사와 함께 사경을 헤매자, 영조는 직접 약(인삼·부자)를 처방했다. 어의는 열로 가득한 경종의 몸에 인삼이 안 맞다면서 만류했지만, 영조는 격식을 무시했다. 인삼을 먹은 경종은 잠시 의식을 되찾았으나, 결국 몇 시간 후에 사망한다. 영조는 경종의 독살설에 평생 시달렸는데, 영조가 독살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노출된 계획이 아니었나 싶다.

 

경종이 죽으면서, 위기에 처한 준소·남인들은 영조의 정통성을 부인하며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1728년(영조 4) 준소·남인은 무신난(戊申亂,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고, 명분은 독살자(영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반란군은 상복을 입은 채로, 밀풍군(소현세자 증손자)를 추대했다. 이인좌 일파는 상복 속에 칼을 숨기고 청주성에 잠입·점령했고, 경상도·전라도에서도 군사가 일어났다. 당황한 영조는 오명항(소론 온건파)을 토포사로 임명했는데, 강경파를 온건파로 잡겠다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었다. 관군은 안성·죽산에서 반란군을 진압했고, 압송된 이인좌는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자결을 강요받은 밀풍군도 죽음을 맞이했다. 반란기세가 강했던 경상도는 반역의 고장으로 낙인 찍혔고, 이후 200년 동안 영남 남인은 고위직에 등용되지 못했다. 영조는 무신난의 경험을 바탕으로 완론탕평(緩論蕩平)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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