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는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한 신진세력 육성에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었지만, 문제는 세조의 바람막이 역할이 1년도 채 되지 않아 너무 빨리 끝났다는 점이다. 1468년 세조가 급서한 후 19세의 예종이 즉위했는데, 세자 시절부터 대리청정을 하며 제왕학을 익힌 예종은 훈구대신의 기를 꺾기 위해 노력했다. 부친의 묘호를 대신들이 올린 온화한 신종(神宗) 대신 세조(世祖, 강력한 무공)로 관철하기도 했는데, 세조의 엄격한 통치방식을 이어받겠다는 의지였을 것이다. 예종 입장에서는 훈구세력·신진세력 모두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예종은 남이를 병판에서 해임한 후, 겸사복장(兼司僕將, 정2품)으로 강등시켰다. 겸사복장은 국왕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무관직으로, 사복(司僕)을 겸하는 관직이었다. 같은 정2품 무관직이라도, 겸사복장은 군사권·인사권을 쥔 병조판서에 비해 권력이 약했다.
<남이의 옥(獄)>은 훈구신하의 입지를 공공히 하는 모순적인 결과를 낳게 되는데, 정치만큼 마음대로 안되는게 없을 것이다. 훈구대신은 왕권교체기에 왕권이 일시적으로 약해진 틈을 타 역모공작을 시작하게 된다. 유자광은 남이가 떨어지는 혜성을 보고 한 말을 역모라고 허위고변(새왕조 도래)했는데, 인사조치에 불만을 품었던 남이가 숙직을 서던 중에 한탄하듯 시를 읊은 것을 기회로 삼았다. 유자광은 남이가 읊은 한시의 중간 구절을 바꿔서 역모의 증거로 삼았다고도 전해지는데, 미평국(未平國)을 미득국(未得國)으로 변형하여 나라를 마치 취하겠다는 의도를 해석한 것이다. 국문 끝에 남이는 허위자백했고, 사흘 뒤 거열형에 처해졌다.
흥미로운 점이 남이가 전장에서 함께 공을 쌓았던 79세의 강순(당시 영의정)을 공모자로 끌어들인 점이다.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은 직감한 남이는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강순의 침묵에 서운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사람의 심리를 헤아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강순도 모진 고문 끝에 허위자백을 하면서 처형당했는데, 전근대시대 폭력적인 고문은 왠만해서는 자백을 받아내는 수사방법이었다. 구성군도 훈구파에 의해 유배되는데, 종친이 비대해지면 왕실에 위협이 된다는 명분이었다.
노련한 권력유지 책략을 펼친 훈구대신은 운이 좋았는데, 예종이 즉위한 지 14개월만에 죽은 것이다. 훈구파의 권세는 성종대까지 공고히 유지되다가,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대거 등용한다. 1818년(순조 18) 남이의 관작이 복구되고, 충무(忠武) 시호를 받았다. 현재 매년 용산구(서울)에서는 남이장군사당제가 열리는데, 억울하고 비참했던 영웅이 무속신앙에서 중요한 숭배대상이 된 것이다. 춘천에 위치한 남이섬도 남이의 돌무덤이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는데, 정식묘역은 화성시에 위치한다. 전례없이 잘 나가는 사람 주변에는 시기하는 사람이 넘치기 마련인데, 유교국에서 새파란 젊은이가 잘 가는 꼴은 꼰대들이 그냥 두고 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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