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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역사] 역대급 초고속 승진, 남이

by Spacewizard 2026.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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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1년 남이(南怡, 의령남씨)는 명망있는 친외가의 핏줄로 태어났다. 정선공주(태종 4녀)의 손자이며, 남재(의령부원군)의 증손주이다. 21살에 세상을 떠난 정선공주는 1남1녀를 남겼는데, 딸은 신자승(신개 아들)과 혼인했다. 정선공주의 외고조손녀가 신사임당으로, 이이도 태종의 피가 흘렀다. 정선공주은 요절했지만, 그녀의 후손은 오늘날 5만원권과 5천원권 지폐의 주인공이 되었다. 남재와 남은(남재 동생)는 개국일등공신으로, 남재는 영의정(태종대)를 역임했다. 남경우(남재 아들, 남이 조부)도 지돈령부사(정2품)을 지냈다.

 

남이가 뛰어난 체력·무예를 갖췄는지 모르겠지만, 1457년(세조 3) 남이는 17세의 나이에 장원급제(무과)했다. 세조는 훈구(勳舊, 공훈이 있는 오래된) 신하를 견제할 필요가 있었는데, 정난공신·좌익공신이 지나치게 많은 권력·토지·노비가 집중되는 것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세조가 왕실종친에서 찾은 유능한 인재가 남이와 구성군(세종 손자, 임영대군 아들)이었는데, 이들은 1441년생 동갑내기였다. 안평대군(세종 3남)과 금성대군(세종 6남)이 단종 편에 섰다면, 임영대군(세종 4남)은 수양대군의 편에 서서 권세를 누렸다. 임영대군은 젊은 시절 여색을 좋아했으나, 구성군은 문무를 겸한 모범적인 인재였다.

 

1467년(세조 13) 함경도에서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세조의 심경은 복잡해졌다. 세조는 훈구대신을 의심하여 감금·배제하는 대신, 구성군을 도총사로 한 진압군(허종·남이·강순)으로 파병했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직후, 남이는 여진족을 소탕하기 위한 명나라와 연합작전에서도 큰 성과를 내었다. 여진족을 정벌 당시 남이가 읊었다는 다음의 한시가 유명하다.

 

 

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豆滿江水飮馬無 (두만강 물은 말에게 먹여 없애니)
男兒二十未平國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부르리오)

 

조선시대 반란의 특징 중 하나는 수괴(주동자)의 목을 베어 오거나 체포해 오면 사면과 함께 엄청난 포상을 준다는 회유책이 늘 작동했다는 점이다. 1467년 이시애가 부하에 의해 체포되어 한양에서 능지처참을 당했고, 157년이 지난 1624년(인조 2) 이괄도 부하에 의해 목이 베었다. 세조는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진압군을 적개공신(敵愾功臣, 적을 향해 성낸 공신)으로 책록하여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키웠다. 1468년(세조 14) 구성군·남이는 27세의 나이에 영의정과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는데, 사실 파격적이지만 비정상적인 인사였다. 당시 27세에 과거시험에 합격하기도 어려웠을 뿐더러, 재상·판서는 수십 년의 관직생활을 거친 후 50대 이후에나 가능했기 때문이다. 구성군 직전에 강순이 짧게 영의정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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