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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역사] 왕가의 공간, 서울공예박물관 #2

by Spacewizard 2026.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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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자을산군)은 의경세자(세조 장남)와 세자빈 한씨의 차남로 태어났는데, 형이 월산군이다. 태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를 여윈 자을산군은 모친과 함께 출궁하게 된다. 1467년(세조 13) 자을산군은 동별궁에서 한명회의 딸(훗날 공혜왕후)과 혼례를 치렸다. 1468년 세조가 죽은 후, 즉위한 예종(의경세자 동생)도 약 10개월 만에 사망하면서 후계문제가 발생한다. 13세의 자을산군은 왕위계승 3순위였지만, 정희왕후(세조 비, 성종 조모)의 명에 따라 드라마틱하게 임금이 된다. 당시 제안대군(예종 아들)은 3살이었고, 월산군은 병중이었다. 자을산군이 예종의 양자 자격으로 경복궁에서 즉위했다.

 

왕위계승 순위에서 밀렸던 성종이 즉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내명부와 훈구대신의 결탁이 있었다. 정희왕후의 의지, 한명회(성종 장인)의 영향력과, 어린 왕을 내세워 막후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훈구대신들의 이해관계가 두루 작용한 결과이다. 왕위계승 1순위와 2순위가 살아 있는 상황에서는 정통성 논란이 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기에, 월산군·제안군을 대군으로 책봉함과 동시에 공신에 임명했다. 즉위 초반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으며, 7년의 섭정기간 동안 국정은 훈구대신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1470년(성종 1) 성종은 남이의 옥에 연루되어 처형된 조영달의 집을 몰수하여, 영응대군 부인 송씨에게 하사한다. 1년 뒤인 1471년(성종 2) 씨는 본인의 집에서 혼례를 치른 인연으로 살고 있던 동별궁의 일부를 성종에게 바쳤는데, 성종은 이 곳을 연경궁(延慶宮)으로 고쳤다. 성종은 연경궁에 부친(의경세자)의 사당을 세운 뒤, 형(월산대군)에게 관리를 맡겼다. 성종은 연경궁을 자주 방문하면서 월산대군과의 우의를 다졌는데, 훗날 성종은 월산대군이 연경궁 내에 만든 정자에 풍월정(風月亭)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성종은 월산대군의 연경궁 뿐만 아니라, 그 옆의 위치한 송씨의 집도 자주 행차했다고 한다. 풍월정은 월산대군의 호가 되었다. 

 

동별궁의 주인, 옹주·공주

월산대군 부부가 후사 없이 죽은 이후, 월산대군의 집은 비어 있게 되었다. 1522년(중종 17) 중종은 혜순옹주(중종 서장녀, 경빈박씨 딸)가 김인경(광천위)와 혼례를 치르면서, 출합할 때 연경궁을 수리하여 하사했다. 당시 많은 신하들이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공간을 공주도 아닌 옹주(후궁 딸)에게 하사하는 것에 대해 격력히 반대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종은 강행했고, 이러한 편애가 오히려 처참한 운명으로 내몰았다. 1527년(중종 22) 세자를 저주한 <작서의 변>으로 경빈박씨와 복성군은 사약을 받고, 혜순옹주는 폐서인이 되었다. 빼어난 미모를 가진 경빈박씨는 중종이 사랑의 감정으로 혼례를 올린 첫 여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들(복성군)도 가장 먼저 낳으면서 중종의 사랑을 차지했었다.


1623년 즉위한 인조는 정명공주를 홍주원(영안위)와 혼인시키면서, 출합할 때 혜순옹주의 집을 하사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광해군에게 핍박받았던 인목대비(선조 계비)와 정명공주(인목대비 딸)를 극진히 대접했는데, 당시 21세의 정명공주는 혼인을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괄의 난으로 이 집은 훼손되었다. 광해군 때 인경궁(仁慶宮)을 건설하다 남은 200칸에 드는 재목·기와를 하사하여 정명공주의 집을 다시 지었는데, 도성 안에서 갑제(크고 화려하게 아주 잘 지은 집)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당시 대간에서는 궁을 지을 목적으로 마련한 재목·기와를 공주의 집을 짓는데 사용하는 것이 부당하다며 반대하였으나, 공사는 계속 진행되었고 결국 100여칸으로 축소하여 완공하였다. 선조의 장녀이자 영창대군의 누이로 태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산 정명공주는 7남 1녀를 두었고, 그 후손이 번성하여 84년 동안 이 집에 거주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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