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4개의 번은 다음과 같다.
조슈번(혼슈) : 시모노세키·하기
사쓰마번(규슈) : 가고시마
히젠번(규슈) : 나가사키
도사번(시코쿠) : 고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1600년 동서대군(20만명)이 교토 동쪽에서 전투(세키가하라)를 치렀다. 결과적으로 서군이 패하면서, 에도막부에서는 힘을 잃게 된다. 서군을 대표한 조슈번(모리 가문)과 사쓰마번(시마즈 가문)은 재기를 위해 260년 동안 기회를 엿봤고, 메이지유신을 통해 막부정권을 무너트린다. 모리(毛利)는 주고쿠(서일본) 지역의 명문 무가가문였다. 아키국(현 히로시마현)의 작은 영주에서 시작하여, 센고쿠시대 모리 모토나리가 주변 10개 구국을 합병하게 된다. 서일본 최대의 영주(다이묘)로 성장한 모토나리가 가문의 결속을 위해 3명의 아들에게 남긴 말이 유명하다.
화살 한 개는 부러지기 쉽지만,
세 개를 합치면 부러지지 않는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데루모토(서군 총대장, 모토나리 손자)는 오사카성을 고수했지만, 내부의 배신·방관으로 패배했다. 이후 도쿠가와는 모리의 영지를 척박한 변방(혼슈 끄트머리 죠슈번)의 36만석(기존 120만석)으로 대폭 축소했다. 하지만 모리가문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염전사업·밀무역과 가풍쇄신을 통해 재정·군사력을 견고히 했다. 야사에서는 매년 새해에 막부를 타도할 타이밍이 왔는지 묻는 의식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쓰마번과의 동맹(삿초동맹)을 통해 막부를 무너뜨린 후, 모리 다카치카(마지막 번주)는 영지를 천황에게 반환(판적봉환)했다.
판적봉환(版籍奉還)은 메이지 유신 직후 다이묘들이 판도(版, 토지)와 호적(籍, 백성)의 지배권을 천황에게 다시 돌려준(奉還) 사건이다. 사카모토 료마가 주도했던 대정봉환(大政奉還, 정치권력을 천황에게 돌려줌)이 국가통치권의 반환이었다면, 판적봉환은 실제 국토·국민을 중앙정부로 귀속시킨 조치였다. 땅을 돌려받는 중앙정부는 기존 다이묘를 지번사(知藩事, 도지사급)로 임명하여, 통치권과 수입(세금의 10%)을 보장했다. 다이묘의 대규모 반발(반란)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판적봉환으로 명분을 쌓은 중앙정부는 2년 후에 폐번치현(廃藩置県, 번을 폐지하고 현을 설치함)을 단행하면서, 지번사들을 전부 해고한 후 현지사(현령)을 판견했다. 다이묘는 영지로 가지 못하고, 교토에 거주하라는 명을 받게 된다. 이후 다이묘는 화족(華族)이라는 새로운 귀족신분을 부여받게 된다.
메이지 정부에서 모리가문은 공작(최고위 귀족) 작위를 받으며 명맥을 이어갔다. 1947년 패전 후 도입된 신헌법에 따라, 귀족제도가 폐지면서 일반시민으로 남아 있다. 현재 모리가문 종가 당주는 한 금속회사의 임원으로 근무하며(내지 했으며), 세간의 추측과 달리 대단한 자산가는 아닌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마즈(島津) 후손은 조산의 유산(토지 등)를 바탕으로 기업(시마즈 흥업)을 설립하여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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