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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역사] 왕가의 공간, 서울공예박물관 #3

by Spacewizard 2026.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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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 흥선대원군이 연경궁(구 동별궁)에 있던 전계대원군(사도세자 서손자, 철종 부)의 사당을 영평군(철종 형)이 살던 누동궁(樓洞宮, 현 종로세무서 동쪽)으로 옮긴 뒤, 1880년 안국동별궁을 신축했다. 참고로 누동궁은 영혜옹주(철종 딸)과 박영효가 혼례를 올린 곳이다. 이 때 명성황후는 3남 1녀를 낳았으나 어릴 때 모두 죽고 차남 이척(훗날 순종)이 왕세자로 책봉된 후 9세가 되어 가례를 앞두고 있었다. 1881년(고종 18) 간택된 세자빈(민태호 딸, 훗날 순명효왕후)이 안국동별궁이 교육을 받게 되었고, 1882년 2월에 성대한 가례식을 거행된다. 1904년 순명효황후이 세상을 떠나자, 삼년상을 치룬 후인 1906년 황태자의 가례를 위한 금혼령이 내려진다. 안국동별궁에서 새로운 황태자빈(윤택영 딸, 훗날 순정효황후)을 간택되었고, 1907년 가례식이 거행되었다. 1907년 이후 안국동별궁은 폐궁되면서, 경복궁·창덕궁에 살던 나인들이 옮겨와 살게 된다.

1910년대 안동별궁 전경 [출처:국사편찬위원회]

1908년 순종은 황위에 오르고, 순정효황후는 창덕궁에서 지냈다. 1910년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순정효황후는 옥새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감춘 옥새를 뺏은 이가 윤덕영(윤택영 형)이었다. 공식실록에 기록은 없지만, 당시 궁인의 증언에 의해 구전되었다고 한다. 1926년 순종이 후사 없이 죽은 후, 순정효황후는 낙선재(창덕궁)에서 지내다가 1966년 숨을 거두었다. 

1906년 민영휘(閔泳徽)는 계동궁터·관상감터(현 현대건설 본사)에 교사를 신축하여 휘문의숙으로 개교했는데, 고종은 민영휘의 이름을 따서 학교이름을 휘문(徽文, 글을 빛나게 함)으로 내렸다. 의숙(義塾)은 익을 위하여 의연금을 모아 세운 교육기관으로, 사숙(私塾, 사설 서당)과 대비되는 말이다. 친일파로 알려진 민영휘는 조선 최대 갑부 중 한명으로, 여러 명의 첩을 두었다고 전해진다. 민영휘의 첩은 지역명 뒤에 마마를 붙여 불렀다고 하는데, 해주마마(안유풍)과 사이에서 3명의 아들(민대식·민천식·민규식)이 있었다고 한다. 이전 글 <왕릉 위에서 세워진 역사, 골프장>에서 1938년 기준으로 경성골프구락부에 가입한 조선인 보통회원 43명 중에 민대식·민규식이 포함되었다고 언급했었다.

 

 

1936년 이왕직은 별궁 6천평 중 4천평 가량을 민대식(휘문의숙)에 매각하여 경성휘문소학교를 세우기로 한 후, 북쪽의 잔여 1,300평 가량에 나인숙사를 신축했다. 기존에 나인들이 살던 남쪽 도로변 약 750평(현 안국빌딩)은 대창산업(최창학)에게 매각했는데, 훗날 최응호(최창학 장남) 소유로 변경되었다. 1945년 3월 민덕기(민대식 손자, 민영휘 증손자)가 증조모 안유풍의 유지를 받들어 경성휘문소학교터에 풍문여학교를 개교하였는데, 휘문처럼 유풍의 이름을 따서 풍문(文)이라 했다.1950년 풍문여자고등학교로 학교명을 바꿨고, 1966년 풍문여고 운동장을 확장하면서 남아 있던 안국동별궁 건물들(정화당·경연당·현광루)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정화당은 우이동에 위치한 민병도(민영휘 손자)의 소유지로 옮겨지게 되는데, 이후 이 곳은 금성산업(훗날 쌍용산업)로 넘어갔다가, 현재 메리츠화재해상보험 중앙연수원의 일부가 되었다. 경연당·현광루 민병도가 사장으로 재직했던 한양컨트리클럽 내로 이전되었다가, 다시 충남 부여의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내에 옮겨져 복원되었다. 2017년 풍문여고는 강남 내곡지구로 이전하였고, 그 자리에 2021년 서울공예박물관이 들어섰다.

안동별궁 유적 경계

고려는 화려하고 장엄한 불교미술과 고고하고 우아한 청자를 낳은 반면, 조선은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채택하여 청렴하고 담백한 공예품이 주류를 이루면서 서민적이고 실용적인 공예가 발달하였다. 그렇지만 조선의 유교는 공예를 서민의 품으로 돌려줬지만, 사농공상에 따라 공예장인의 능력을 홀대했다.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끊임없이 한국의 문화재를 약탈해 가고 도공을 끌고 갔으며, 심지어는 조선의 정신까지 왜곡 및 말살하려 했고, 300년이 지난 일제 강점기에도 국보급 각종 문화재 수탈과 민족문화말살을 이어갔다. 이 와중에도 조선의 도공은 자의든 타의든 돌아오지 않았다. 서울공예박물관은 조선시대 내내 소외받던 공장에서의 공예작품들이 신분을 거슬러 올라 왕가의 공간에서 주목받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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