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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역사] 조선의 비선실세, 송익필

by Spacewizard 2026.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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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9년(선조 22) 안씨가문에서 제기한 송사를 통해 안처겸의 역모가 조작임이 밝혀졌고, 장례원(掌隷院, 노비문제 관할)은 송익필 일가를 다시 안씨가문의 노비로 판정했다. 이에 송익필 일가 70여명은 도피생활에 들어갔고, 안씨가문은 추노꾼을 고용하여 흩어진 송익필 일가를 찾아 나섰다. 1575년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송사련(송익필 부)은 생전에 다시 노비로 전락하지 않았으니 팔자가 나쁘지 않았다고 본다. 이전 글 <조작을 통한 신분상승, 송사련>에서는 송사련이 외삼촌 일가를 멸문지화시켰다고 언급했었다. 

 

추노(推奴, 노비를 조사함)는 도망노비를 추(追, 쫒을)하는 것이 아닌, 주인에게 추(推, 밀다·조사)하는 것이다. 추쇄(推刷, 조사하여 찾다)는 부역·병역을 기피하고 도망친 노비를 잡아, 원래의 주인이나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정조가 즉위하기 전까지는, 노비의 추쇄를 쇄관(刷官, 노비를 잡아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벼슬아치)에게 맡겼었다. 추노는 사실상 채권추심과 유사했는데, 잡은 도망노비를 주인집에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밀린 신공(身貢)을 징수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이이·송익필은 파주와 가까운 황해도를 근거지로 했으며, 이이는 벼슬자리에서 물러나면 황해도에서 수시로 머물렀다. 송익필의 친족들도 대부분 황해도 해주에서 모여 살았다. 한준(황해도 관찰사)은 전라도 시골마을에서 일어난 정여립의 난을 고변했는데, 황해도 서인이라면 송익필의 제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기축옥사(己丑獄死, 정여립의 난)이 있기까지, 송익필은 3년 가량 전라도·황해도 일대를 숨어다녔다. 특히 전라도 운장산(雲長山, 전북 진안군)에서 오랫동안 숨어 있었는데, 운장산 옆에 구봉산(9개의 봉우리)이 있었다. 송익필의 호·자가 구봉·운장이었다. 운장산에 머지 않은 곳에 죽도(정여립 본거지)가 있었기에, 송익필은 정여립의 동태를 쉽게 살필 수 있었을 것이다. 

 

서인은 정여립·이발 일가를 죽인 후 동인에 대한 복수를 시작했지만, 동인세력(이산해·류성룡 등)으로부터 반격으로 크게 쇠퇴하게 된다. 임진왜란을 1년 앞둔 1591년, 사헌부에서 송익필 형제에 대한 처벌을 주청했다.
 
사노(私奴) 송부필, 송익필, 송한필 등은 사대부의 집에 드나들면서

조정의 시비(是非)와 사대부의 진퇴(進退)에 관여하여 논하지 않음이 없으며,

사론(邪論)을 선동하여 일국을 교란시키는가 하면

심지어 남을 시켜 상소함으로써 사림(士林)을 모함하는 것을 평생의 능사로 삼고 있습니다.

수십 년 이래 사론(士論)이 갈라지고 조정이 조용하지 못했던 것은

모두 이들이 현란시킨 소치입니다.

그 사정을 추궁하여 보니 그들이 본 주인에게 죄를 짓고 온 가족이 도망 나와

권문(權門)에 의탁해 소굴로 삼은 뒤

기필코 세상을 뒤엎어서 옛주인에게 보복하려 했던 것입니다...

지금 그 죄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뒷날의 화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이니

유사에게 명하여 끝까지 수색 체포하여 율대로 죄를 정하소서.
 
당시 조정은 송익필 일가를 노비가 아닌 양반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송익필 형제의 유배형으로 확인할 수 있다. 유배형은 양반관료들에게 주로 내려지는 형벌이었다. 송익필은 유배지(평안도 희천)에서 임진왜란을 맞았고, 왜란 중 서인의 복귀로 송익필도 해배되었다. 1596년 김장생은 마양촌(충청도 당진군)에 송익필의 거처를 마련해주었고, 2년 후인 1598년 창녕성씨(송익필 부인)과 성혼이 죽음을 맞이한다. 1599년 송익필은 세상을 떠났지만, 죽은 지 24년이 지난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활한다.  논공행상을 거쳐 52명의 정사공신(靖社功臣)이 책봉되었는데, 1등공신 9명은 송익필과 직·간접적인 사제관계에 있었다. 

김류·이귀 : 송익필 제자
김자점 : 성혼 제자
최명길·구굉·신경진·이서 : 김장생 제자

심명세 : 심의겸 친손자

심기원 : 권필(정철 제자) 제자


당시 76세의 김장생은 거사의 스승으로 추대되어 사헌부 장령(掌令)에 제수되었고, 인조에게 정치를 가르쳤다. 대외적으로 서인학통이 정입되는 과정에서 이이가 종주로 추대되었지만, 송익필의 사상도 주입되었을 것이다. 서인에게 송익필의 존재는 부담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었지만, 서인은 비선종주에 대한 의리를 조선왕조 내내 지켰다. 조선 후기 이어진 당파(서인·노론·벽파)는 송익필의 신원회복은 꾸준히 시도했고, 1751년 홍계희(충청도 관찰사)의 주청이 수용되었다. 사후 150여년이 지난 1752년(영조 28) 송익필은 면천되면서,  정5품(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다. 또 다시 150여년이 지난 1909년(순종 3) 송익필은 제학(규장각)에 추증되면서,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서인은 숨겨진 종주에 대한 의리를 300여년 가까이 지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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