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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역사] 사악한 종교로 몰렸던, 동학

by Spacewizard 2026.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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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전라북도자치도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유족으로 결정·등록된 자녀·손자녀·증손자녀 중 전라북도 내에 1년 이상 계속 거주(2026년 1월 1일 기준)한 사람에게 수당을 지급한다고 발표했다. 723명에게 인당 연 120만원(월 10만원)을 지급하는데, 재원은 도와 시·군이 7:3 비율로 분담한다. 총 재원(8억원대)은 그리 크지 않으니 재정자립도는 차치하고, 과연 130년 전 사건의 유족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또한 전근대 왕조시대 사건에 대한 보상을 현대 민주공화정에서 세금으로 지원하는 것이 법적·체제적 연속성 측면에서 합당한지 의문이다. 더 오래된 사건(왜란·호란 의병 등)이나 의미가 큰 현대사건(한국전쟁·베트남전쟁 유가족 등)과의 형평성도 문제가 될 것이다.

 

조선시대 말기 최제우는 신분질서 타파와 평등을 외쳤던 유생이었는데, 서학을 접한 후 다음의 깨달음을 얻는다. 

 

시천주(侍天主) : 사람은 누구나 내면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

 

최제우(동학 1대 교조)는 깨달음을 실행하기 위해 여자노비(여종) 2명을 면천하여 각각 큰 며느리와 수양딸로 삼았는데, 당시로서는 파괴적 혁신이었다. 내세만 강조하는 타 종교와 달리, 동학은 현세의 모순을 타파하려는 사회개혁종교에 가까웠다. 훗날 손병희(3대 교조)는 시천주 개념을 이해하기 쉽게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을 유행시켰다. 1864년 최제우는 사학죄(사악한 종교 전파)로 참수되었지만, 그의 평등사상은 100년도 채 되지 않아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올랐다.

 

1885년 동학의 본거지를 장내리(충청도 보은군)으로 이전한 후, 동학의 교세이 더욱 강해지는 만큼 관의 수색·탄압도 잦아졌다. 1892~1893년 동학농민혁명(갑오농민운동)에 앞서 5차례(공주·삼례·광화문·보은·금구)에서 교조신원운동이 펼쳐졌는데, 최제우의 신원(伸冤, 원통함을 펴다)과 동학포교의 자유를 인정받기 위한 목적이었다. 1871년 이필제의 난을 최초의 신원운동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1892년 10월 : 충청도 공주(충청감영)
1892년 11월 : 전라도 삼례
1893년 2월 : 한성 광화문
1893년 3월 : 충청도 보은
1893년 3월 : 전라도 금구

 

1차 공주에 집결한 동학교도는 조병식(충청감사)에게 최제우의 죄명을 지워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으나, 권한 밖의 일이라고 거부했다. 1달 후 삼례역에 집결한 동학교도는 이경직(전라감사)에게 포교의 자유와 수탈금지를 요구했으나, 신원문제는 조정에 상소하라는 답변을 얻었다. 결국 지방에서는 해결될 일이 아님을 깨닫고, 3개월 후 광화문 궁궐 밖에서 3일 동안 복합상소운동을 벌였다. 고종은 해산을 조건으로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해산 후에 동학처벌명령을 내린다. 동학교단은 고종의 기만책에 평화적인 수단(상소)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이 때 흥선대원군은 동학농민군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면서, 이준용(흥선대원군 손자)를 왕으로 추대하려다 실패했다. 전봉준은 흥선대원군의 약속을 신뢰했다. 하지만 최시형(2대 교조)는 흥선대원군을 신뢰하지 않았는데, 이용만 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이다.

 

1달 후 수만 명이 장내리에서 대규모 장기시위를 벌였는데, 이 때 다음의 구호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단순한 종교운동 넘어 정치운동(반외세) 되었다.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 일본과 서양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킴

 

조정은 어윤중(양호선무사)과 군대를 보내 회유·압박을 했고, 탐관오리를 파면하는 조건으로 자진해산시켰다. 보은집회와 같은 시기에 금구에서도 농민교도들이 집회를 열었는데, 금구집회는 보은집회보다 더 급진적이고 호전적이었다. 교조신원운동 초기에는 교조의 누명을 벗겨달라는 요구였지만, 보은·금구 집회에 와서는 부패한 탐관오리를 처벌하고 외세를 물리치자는 사회변혁운동으로 변모했다. 결국 1894년 동학농민혁명(갑오농민운동)으로 이어졌다. 신원운동을 장기간 진행했던 이유는 부패한 재판관과 정의롭지 못한 재판에 있었다. 당시 지방관·아전은 동학을 사학(사악한 종교)로 몰아 제대로 된 재판 없이 고문·투옥시킨 후, 죄를 면해주는 대가로 속전(합의금)을 챙기는 관행이 있었다. 많은 동학교도들은 악순환의 반복을 평화수단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느끼면서 분노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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