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이후 오늘날의 소공동의 행정구역은 다음과 같다.
조선 : 호현방(好賢坊, 한성부 남부)
1911년 : 소공동(경성부 남부)
1914년 : 장곡천정
1946년 : 소공동(서울시 중구)
고종대 호현방(好賢坊, 현인들이 좋아하는 동네)은 회현방(會賢坊, 현인들이 모인 동네)으로 개칭했는데, 현재의 회현동·남창동·소공동·정동 일부를 포괄했다. 조선시대 남촌(南村, 청계천 이남)은 경화세족들이 모여 살기도 했지만, 주로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가난한 선비들이 거주했다. 기상과 상관없이 하나 뿐인 나막신을 신고 다녔던 선비는 <남산골 샌님> 내지 <딸깍발이>로 불렸다. 19세기 말 개항기 이후, 일본인들은 회현방과 인접의 명례방(명동·충무로) 일대를 장악하면서 혼마치(本町)를 형성했다. 과거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진을 쳤던 왜성대(예장동 일대)와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전 글 <조선 기생과 일본 접대가 만난, 요정>에서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일본상인들이 진고개 일대에 자리 잡았다고 언급했었다.

일제강점기 장곡천정(長谷川町, 현 소공로)은 경성을 대표하는 금융·상업거리로, 대형 석조건물이 밀집한 경성의 월스트리트에 가까웠다. 장곡천정과 조선은행 앞 광장(현 한국은행 앞 교차로)는 조선인의 북촌(종로 일대)과 일본인의 남촌(진고개 일대)을 연결하는 공간이었다. 장곡천정에서 혼마치(진고개)로 들어서는 순간, 경성의 화려한 근대소비문화(네온사인·쇼윈도·백화점·카페·양복점 등)이 드러났다. 1898년 대한제국 황실은 헐버트(미국 선교사)로부터 구매한 벽돌집을 대관정(大觀亭, 크게 바라보는 정자)이라 불렀고, 1899년 대관정을 황실 영빈관(귀빈접대·연회·외빈숙소 용도)로 사용했다. 대관정 명칭이 언제 어떻게 붙여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대관정이 위치했던 언덕은 덕수궁·태평로를 한 눈에 내려다볼 정도로 전망이 뛰어났다고 한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조선을 점령한 일본군이 군사령부와 사령관(하세가와 요시미치)의 관저로 삼았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당시 이토 히로부미도 대관정에 머물렀으며, 1907년 군대해산을 통보했던 곳이다. 1904년 8월 주차군사령부는 필동 군영지(현 남산한옥마을)에 자리잡았고, 4년 후인 1908년 10월 용산 신병영으로 이전했다. 1914년 조선총독부는 대관정 일대(현 소공동)를 사령관 이름을 따서 장곡천정(長谷川町, 하세가와초)이라 했다. 1923년 미쓰이물산이 대관정을 일본육군으로부터 매수했고, 3년 후인 1926년 경성부 소유로 넘어갔다. 1927년 경성부립도서관이 대관정으로 이전하면서, 조선총독부도서관(1925년 설립)과 가까워졌다. 일제는 소공동 일대를 국가 지식공간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64년 도서관이 남산으로 이전한 후에는 민주공화당 당사로 이용되다가, 1970년대 대관정 건물은 철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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