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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역사] 우장춘의 이종사촌, 구용서

by Spacewizard 2026.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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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우범선·구연수는 일본 낭인(자객)들과 공모하여 궁궐에 진입한 후, 명성황후(민비) 시해 과정에 적극 참여했다. 고종·민비가 역대급으로 부패한 왕족이었다고 하더라도, 외국인(일본인)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점은 명백한 국권침탈이다. 물론 국권을 내세울 국력 조차 없었기에, 큰 시대흐름 속에서 나타난 하나의 사건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시대흐름을 읽고 강대국의 앞잡이가 된 우범선·구연수는 당대 최고의 기회주의자(친일파)로 평가받을 만 하다.

 

당시 우범선은 군대 고위간부(조선군 훈련대 제2대대장)였는데,  미우라 고로(일본 공사)에게 포섭되어 시해작전에 조선군대를 직접 동원하면서 궁궐 침입을 주도했다. 우범선은 증거인멸을 위해 민비 시신을 이불에 싸서 옮기고 석유를 뿌려 태우라는 지시·감독을 했다. 구연수는 우범선의 휘하의 지휘관(중대장)으로, 일본 낭인들을 경복궁 내부로 안내했다. 우범선·구연수는 을미사변 만행으로 인해 체포령이 내려졌고, 낙동강 하구 염전에 숨었다가 일본(도교 혼고 주변)으로 피신했다. 우범선·구연수는 일본 현지에서 사카이(酒井) 자매(나카·와키)를 부인으로 삼으면서, 우범선은 구연수의 손윗동서가 되었다.

 

우범선은 일본에서 아들 2명을 낳았는데, 우장춘(1898년생)과 우홍춘(1900년생)이다. 우장춘일본 호적법상 사생아(혼외자) 신분으로 등재되었는데, 1898년 당시 우범선은 조선에 본처를 둔 유부남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고종은 을미사변 총책이었던 우범선을 암살 1순위로 삼았으며, 1903년 자객(고영근)을 보내서 우범선을 암살했다. 이후 나카는 우홍춘을 일본인 친척의 호적에 올렸는데, 일본사회의 차별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도쿄대학 법과대학을 졸업한 우홍춘은 대기업 임원을 지내면서, 평생 한국인임을 부정했다. 반면 우장춘은 호적을 한국인으로 고친 후, 한국에서 사망했다.

 

구연수는 일본 망명생활 중 도쿄제국대학(농과대학)에 입학해 기술을 배우며 철저히 일본인으로 동화되어 살면서, 구용서(1899년생)를 낳았다. 1907년 구연수는 대사면령(대한제국 순종 즉위 기념)을 계기로 일본식구를 뒤로 하고 조선으로 귀국했다. 귀국한 구연수는 송병준(당시 농상공부대신)을 찾아가 일진회(친일단체) 평의원으로 활약했고, 얼마 후 송병준의 딸과 재혼했다. 송병준도 1896년 아관파천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송병준이 일본군 통역관으로 귀국하여 일진회를 조직했다. 재혼 이후 구연수는 고위 경찰직(경무사·경시부감·경무관 등)과 중추원 참의(조선총독부 자문기관) 자리까지 올랐는데, 장인의 정치적 영향력에 힘입은 바가 컸을 것이다.

 

구용서은 우장춘(구용서 이종사촌 형)과 서로 의지하며 성장하다가, 1910년대 구용서는 아버지를 따라 경성중학교(현 서울고등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경성중학교는 일본인 자녀 및 친일 귀족자제들을 위해 설립된 학교였는데, 이전 글 <조선인 엘리트의 산실, 고보>에서 경성중학교(훗날 서울고등학교)가 고등학교명에서 <서울> 타이틀을 가져갔다고 언급했다. 

 

구용서는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도쿄상업대학(현 히토쓰바시 대학)를 졸업한 후, 1925년 조선은행(한국은행 전신)에 특채로 입사했다. 조선에서 잘 나가던 친일파 부친의 금전적 지원과 고위인맥의 영향을 확실히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도쿄지점에서 금융실무를 익힌 구용서는 이후 조선지점(신의주·부산 등)에서 근무하다가, 1942년 여수지점장에 보임되면서 조선 금융계의 레전드가 되었다. 조선인 최초의 조선은행 지점장(지배인)이라는 타이틀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50년 한국은행 초대 총재를 거친 후, 대한석탄공사 총재와 상공부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한국사회 엘리트로 자리잡은 구용서는 이종사촌 형의 환국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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