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목멱산(木覓山, 현 남산) 남쪽의 이태원은 뜨내기가 많은 번잡한 마을이었는데, 원(院, 출장관원의 숙박시설)이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태원은 산수가 수려한 공간으로, 도성 안의 부녀자들은 빨래를 위해 자주 찾기도 했다고 한다. 이태원은 왜군의 흔적이 많은 공간인데, 이는 430여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1592년 한성을 점령한 가토 기요마사는 운종사(雲種寺, 현 이태원 인근 비구니사찰)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오랜 전투에 몸이 지친 가토는 잠자리에서 여자가 생각났는데, 당시 전쟁통에서 기생 찾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왜장들은 비구니들은 범한 후, 운종사를 불태웠다. 윤경산 자락에는 마을의 안녕을 빌던 부군당이 있었고, 비구니들은 부군당 주변에 토막집을 짓고 살았다. 일부 임신한 비구니는 출산을 하게 된다. 이 때 윤경산의 토막집을 이태원(異胎院, 이방인의 아이를 밴 집)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윤경산(潤慶山)은 둔지산(屯智山) 주변의 과거 지명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이태원동·한남동·보광동 일대에 걸친 남산자락일 것이다.
선조가 몽진에서 환도하자, 왜군에게 겁탈당한 여인의 처우문제가 논의되었다. 조선 사대부들은 정절을 잃은 처를 수치스럽게 여겼지만, 선조는 이혼을 금지시켰다. 1607년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조선인 포로를 데리고 왔을 때에도, 이 중 임신·출산을 여인들은 이태원에 모여 살게 했다. 임진왜란 이후 이태원에 모여 사는 항왜(투항한 왜군)를 이타인(異他人)이라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이후 2차례의 호란으로 포로가 된 여인들은 임진왜란 때처럼 이태원으로 몰아 넣을 수가 없었다.
1627년 급성장 중이던 후금(만주족)이 인조반정(1623년)을 빌미로 조선을 덮쳤는데, 다음 2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포로를 통한 인구 확보
진압을 통한 후방공격 방지
명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한 사전작업 정도였다. 당시 후금(150만명)은 만주족(100만명)과 내몽골에서 흡수한 몽골족(50만명) 정도였지만, 조선인구는 1,100만명 수준이었다. 특히 조선의 젊은 여인들을 데려가서, 첩으로 삼거나 농사를 짓게 하려 했다. 2차례 호란으로 끌려간 포로는 총 60여만명 수준이었는데, 그 중 50만명 가량이 여자였다. 압록강을 건너 만주땅을 밟은 조선인 포로는 도망치더라도, 청나라에 돌려줘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식구들이 청나라의 끌려간 여자포로들을 돈을 주고 데려오기 시작했고, 일부 포로들은 탈출하기도 했다. 결국 청나라는 속환(贖還, 몸값을 받고 돌려보냄)을 제시하면서, 여성포로들이 대거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문제는 대부분의 환향녀(還鄕女, 속환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가 몸값을 지불할 능력이 되는 양반가(친정) 출신이었기에, 임진왜란 때처럼 이태원으로 몰아 넣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조정이 생각해 낸 기발한 발상이 목욕을 통한 면죄부였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여자들에게 홍제원 냇물(연신내)에서 몸을 씻게 한 것이다. 연신내(延臣川, 신하가 늦게 온 시내)는 인조반정 당시 홍제원 부근에서 능양군(훗날 인조)이 늦게 도착한 이서를 맞이한 개천이라 하여 붙여졌다. 또 다른 설로는 연서역(延曙驛) 주변을 흐르던 개천(연서천)이 변형되었다는 유래설도 있다. 목욕 면죄부에도 불구하고 사대부의 이혼허락 상소가 계속되자, 인조는 환향녀의 신분보장(정처)을 위해 첩을 두라는 교지를 내렸다. 이미 양반들은 축첩을 많이 하고 있었음에도, 본처를 대체하지는 말라는 권고였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성적으로 문란한 여자를 화냥년이라고 빗대는데, 이는 환황녀에 대한 지독한 인식이 400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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