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 한달 사흘 만인 1932년(태조 1) 8월, 이성계는 이방석(막내아들)을 세자로 책봉했고, 이 세자책봉 건을 계기로 정도전 세력은 이방원과 적대구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전 글 <머리와 처세로 출세한 얼자, 하륜>에서 게재된 태조의 가계도를 보면 알겠지만, 개국공적·적통성이 다음의 아들들을 무시한 처사였다.
이방우(장남)
이방과(차남) : 훗날 정종
이방원(오남) : 훗날 태종
물론 정도전 세력의 입장에서는 물 들어올 때 노 젖는 심정으로 신권(臣權)의 우위를 확고히 하기 위한 신의 한수였을지도 모른다. 세자책봉이 있고 6년이 지난 1398년(태조 7) 3월, 사병폐지와 함께 관군양성을 요청했다. 정도전 세력은 이방원과의 적대구도를 넘어 승기를 잡기 위한 방책을 펼쳤다. 그 해 8월 중순 사병을 잃은 이방원은 정치적으로 매우 위축되었을 것이고, 이는 궁서설묘(窮鼠齧猫,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였을지도 모른다. 너무 궁지에 몰리면 약자라도 크게 반발하여 예상치 못한 일을 저지르는 법이며, 이는 도리어 자신에게 큰 피해로 돌아 올 수 있다.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은 항상 잃을 것이 없는 이를 대할 때 조심해야 한다.
이방원의 생각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왕권후보에서 배제된 억울함을 장시간 동안 숨긴 채 지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본인의 권력기반인 사병마저 뺏어간 일이 계기가 되어 목숨을 건 승부수를 불가피하게 결심했을 것이다. 마침 하륜은 이방원의 모의첩보를 입수했다. 궁지에 몰린 이방원이 쿠데타를 결심하였다고 한들,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었다. 세자(이방석)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일을 도모해야만 명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배가 볼록하여 지목된, 정도전
때마침 사병을 철폐된 시점을 전후하여 이성계는 중병을 앓고 있었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여 1398년 8월 26일 저녁 왕족들은 근정문 밖의 서쪽 행랑에서 숙직하고 있었고, 같은 시각 정도전 세력들도 남은의 첩(송현방)집에 모여 있었다. 이들은 곧 있을지 모를 이성계 승하에 따른 정치적 혼란과 그 대응에 관한 논의를 하였을지도 모른다. 이방원은 저녁 10시쯤 안산군수 이숙번 등의 병사들을 대동하여 송현방으로 향했고, 그 병사들을 경복궁·육조거리 및 남은의 첩집 주변에 배치하였다.
도주로를 차단하기 위해 남은의 첩집과 이웃한 3곳의 이웃집에 불을 붙인 후, 가내로 진입한 쿠데타군은 정도전·남은·이직을 제외한 나머지를 그 자리에서 죽였다. 정도전은 간신히 담을 넘어 옆집으로 대피하였으나, 그 집주인이 숨여든 배가 볼록한 자를 신고하면서 정도전은 잡히게 된다. 이전 글 <조선 2인자의 픽, 정도전 집터>에서 정도전이 최후를 맞이한 송현방 내 남은의 첩집터가 현재 중학동 트윈트리타워 즈음으로 추정된고 언급했는데, 열린송현 녹지광장 바로 맞은 편이다.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이 소실된 이후, 자연스레 송현에 대한 관심으로 식어가게 된다.
노동에서 배제된 지배층, 그리고 비만
흔히 생각하는 조선시대 백성의 이미지는 시꺼먼 피부에 깡 마른 모습다. 근대 이전에는 오늘날과는 다르게 풍부한 식품과 편리한 교통수단, 기술·자본 집약적인 업무환경 등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식량 확보와 생존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지주·귀족·양반으로 대표되는 지배층은 상대적으로 덜 어려웠을 것이다. 광(창고)에는 잉여식량이 쌓여 있었고, 노동강도가 낮은 관리·행정직을 수행하였다. 즉 많은 칼로리를 섭취한데 비해 적은 칼로리를 소모했기 때문에 비만이 될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비만체형이 풍요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외형적으로 마이너스 요인이 아니었으며 건강에 신경쓸 여유·기술도 없었다. 다음의 속담은 비만을 지향하는 가난한 사회를 내포하고 있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
드라마나 영화 속의 정도전은 대부분 날씬한 체형으로 나오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죽기 직전 옆집으로 피신한 정도전을 향해 옆집 주인은 배가 볼록한 자로 그를 묘사했는데, 펑퍼짐한 한복차림임에도 볼록한 배가 드러날 정도라면 확실한 비만체형이었을 것이다. 신분사회에서 육체적인 노동과 서비스는 피지배계층인 노비들이 주로 제공하였고, 지배계층은 책상 앞에서 학문과 행정에 전념한 나머지 몸을 움직일 기회는 많지 않았다.
양반·관리들도 그러했으니, 국왕은 과체중에서 비롯된 대사질환을 달고 살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일국 최고의 어의가 옆에 있다한들 당시의 의술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 없는 수준이다보니, 종기로 인해 죽은 국왕들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 궁에는 화장실도 없을 뿐더러, 국왕은 방 안에서 궁녀의 도움을 받아 매화틀(이동식 용변기)에서 용변을 처리했다. 성군이라 칭송받는 조선 세종은 운동을 멀리하고 공부를 가까이 했을 뿐만 아니라, 무절제한 식습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결과 건강은 엉망이 되었고, 평생을 안질·당뇨·어깨통증·관절질환·중풍 등의 질병들을 달고 살았다.
나비효과·평행우주에 기반한, 상상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는 미세한 변화 내지 사소한 사건이 향후 예상치 못한 엄청난 파장이나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개념으로, 1972년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Edward Lorenz)가 발표한 예측 가능성(브라질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개짓을 하면 텍사스에서 돌풍(토네이도)를 일으킬 수도 있는가?)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유래되었다. 로렌츠가 말한 나비효과는 복잡계(복잡한 시스템)를 전제하고 있는데, 역사만큼 긴 시간과 많은 인물들로 구성된 복잡계도 없을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의 생각을 모아서 사후에 편찬한 팡세(Pensées)에는 다음의 말이 나온다.
인간의 공허를 충분히 알고자 하는 사람은 연애의 원인과 결과를 생각하면 된다. 그 원인은 '나로서는 모르는 것'(코르네유)이다. 그러나 그 결과를 무서운 것이다. 이 '나로서는 모르는 것', 사람이 알 수 없는 작은 것이 전 지구와 황후와 군대와 전 세계를 움직인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낮았더라면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알 수 없는 작은 뭔가로 인해 시작된 연애의 결말은 무서울 수도 있다는 이는 앞서 말한 나비효과를 아주 오래 전에 나타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정도전의 볼록한 배가 이방원의 기습을 피해 신속한 월담이 가능했을 정도로 날씬했다면, 태종시대 이후의 역사는 어떠했을까 생각해본다. 이전 글 <특이점의 팽창과 미궁, 다중우주>에서는 양자측정의 모든 가능한 결과는 파동으로 되어 있지만, 우리 자신이 선택한 하나의 입자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라고 언급했다. 정도전이 이방원의 칼날에서 무사히 벗어나서 전개되는 새로운 세계가 또 다른 평행우주에서 펼쳐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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