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 <머리와 처세로 출세한 얼자, 하륜>에서는 조선 새도읍 후보로 공주 계룡산, 무악 및 한양이 거론되었고, 결국 정도전이 추천한 한양이 새도읍으로 정해졌다고 언급했다. 조선은 도읍·궁궐을 정함에 있어 풍수지리를 중시하였다. 한양을 새도읍으로 정한 후에도, 경복궁의 위치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무학대사는 한강 남쪽에서 오는 화기를 막으려면 궁을 동향으로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정도전은 중국의 선례를 들며 남향을 고집했다. 새도읍에 이어 궁궐의 배치까지 정도전의 의견이 받아들여지면서 경복궁은 지금처럼 남향으로 지어진다. 하지만 이전 글 <조선 2인자의 픽, 정도전 집터>에서는 정도전의 집터 내에 안채, 서당, 마구간의 배치가 풍수지리에 맞춰졌다고 언급했는데, 정도전 또한 풍수지리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한양 주위의 바위로 된 악산(관악산·인왕산·도봉산)에서 나오는 화기를 막기 위해 풍수적 장치를 곳곳에 해놓았다. 숭례문(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쓴 것도 관악산의 화기로부터 경복궁·도성의 화재를 막기 위함이었는데, 숭(崇)자는 불꽃이 위로 타오르는 듯한 모양이고, 례(禮)는 오행으로 화(火)이며 방위로는 남향을 나타낸다. 숭례(崇禮)는 남쪽에서 불이 타오르는 풍수적 의미를 담고 있는데, 글씨를 가로로 하면 불이 잘 타지 않기 때문에 세로로 세워 불이 잘 타게 함으로써 불은 불로 막는다는 풍수이론을 따랐다고 한다. 이전 글 <계유정난의 시작, 서대문>에서는 서대문 바깥에 연못 서지를 만들었다고 언급했다.
숭례문 바깥에 자그마한 연못 남지(南池)를 만들었는데, 이는 물의 기운으로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겠다는 시도였다. 광화문에서 숭례문까지의 길을 직통이 아닌 우회길(종각·광교 우회)로 만들었는데, 이는 남지·숭례문을 통과한 관악산의 화기가 곧은 길을 따라 경복궁에 미칠 영향을 우려했던 것이다. 마침 당시 육조거리가 끝나는 지점(현 세종로 사거리)에는 나지막한 언덕 황토현(황토마루)이 위치하여 관악산의 화기가 경복궁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것을 자연적으로 막아 주었으며, 황토현 앞에서 종루(보신각) 방향으로 꺾이는 도로를 만들었다. 황토현을 현재의 지명으로 설명하자면, 세종로사거리에서 남쪽으로 솟아 올랐다가 청계천 광장과 정동까지 고도가 유지되다가 무교동 쪽으로 내려오는 나즈막한 언덕이었다고 한다.

1890년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광화문 앞에 해태상 한 쌍을 세웠는데, 상상 속의 동물인 해태는 관악산 꼭대기를 노려보며 불을 먹을 기세를 하고 있다. 1923년 10월 경복궁에서 개최되는 대규모 박람회 조선부업품공진회(朝鮮副業品共進會)를 앞두고 광화문 앞의 해태상은 경복궁 내로 옮겨졌다. 원래 해태는 불을 먹기도 하지만, 선악과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알아, 사람들이 죄를 짓거나 다투고 있으면, 죄인을 찾아내어 벌하는 법과 정의를 상징하는 영물로 여겼다. 조선시대 사헌부 관헌들의 옷에도 이런 의미로 해태를 새겼는데, 관리들의 비리를 철저히 감시하라는 의미였다.
조선시대 을지로 언덕, 구리개
조선시대 한양도성 4대문을 잇는 길을 보면, 종로(서대문~대문)와 남대문로(종각~남대문)는 대로였지만, 을지로(서울시청~광희문)는 좁은 도로였다. 조선시대 내내 세종로 네거리와 남대문 사이의 태평로는 황토현에 막혀 있었는데, 1900년 전후 고종이 경운궁(현 덕수궁)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하면서 경운궁에서 육조거리를 잇는 도로를 개설한 것이다. 1912년경 태평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덕수궁의 상당부분이 편입되면서 현재의 서울시청 앞의 넓은 공간을 확보하였다. 이 때 을지로(시청앞~을지로입구) 초입 구간의 도로도 확장되었다. 2010년 세종로와 태평로가 합쳐지면서, 세종대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현재의 을지로를 구리개라 불렀는데, 이는 멀리서 보면 햇볕에 빛나는 구리처럼 보이는 황톳길 언덕이라는 의미였다. 구리개에는 국방(체찰사부·하도감), 의료(혜민서), 외교(사자청), 문화(장악원) 등을 담당하는 관청들이 위치했었다. 특히 혜민서 주변에는 한약방이 발달하여, 한성의 한약재는 모두 구리개의 한약방에서 거래되었다. 구한 말에는 구리개를 동현(銅峴)이라고 했다.
청나라가 장악한, 구리개
남별궁(南別宮, 현 웨스틴조선호텔 자리)은 경정공주(태종 차녀) 부부가 살던 집으로, 소공동은 소공주댁(小公主宅, 작은 공주댁)에서 유래한 것이다. 참고로 경정공주는 조대림(조준 아들)에게 출가했고, 공주댁이 의안군(선조 아들)에게 이어지면서 남별궁이라 불렸다. 당시 남별궁은 도성 내의 가장 큰 집 중 하나로, 임진왜란에는 왜군·명군이 번갈아 가며 주둔했었다고 한다. 의주까지의 몽진에서 돌아온 선조는 파괴된 경복궁 대신 경운궁에 머물면서, 근처의 남별궁에서 머물던 명나라 장수·사신들을 자주 접견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남별궁은 청사신들의 숙소·접대장소로 이용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군을 인솔한 오장경과 1883년 총판조선상무위원(공사)로 부임한 진수당은 남별궁을 공서로 삼았으며, 이후 청상(청나라 상인)을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구리개 일대(소공동·북창동·명동·관수동)에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었다. 이전 글 <여러모로 권력을 노렸던 공간, 헌법재판소 터>에서 1887년 초 구리개의 청국병영 옆(전 외환은행 본점, 현 하나금융그룹 자리)으로 제중원이 확장 이전하였다고 언급했었다.
제중원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청국병영(현 IBK 파이낸스타워 자리), 남서쪽에는 청공사관(현 중국대사관 자리)이 있었는데, 이는 당시 권력의 중심이었던 원세개(위안스카이)가 제중원의 이전에 관여했다는 방증일 수 있는데, 나름 차이나타운 근처에 의료인프라를 구축하려 했으려나. 당시 구리개 일대는 청계천 너머의 공간으로 외국인인 청나라 사람들이 정착하기에 비교적 수월했을 것이다.

1914년에 구리개는 동일한 의미를 가진 일본식 이름 황금정통(황금정)으로 변경된다. 구한말 청상이 구리개 일대에 자리 잡은 이후, 일제강점기에도 화교들은 황금정에 많이 거주했다. 그리고 해방 이후 북한에서 월남한 화교까지 명동과 황금정 일대에 정착하게 되면서, 1946년 정부는 화교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황금정을 을지로로 개칭한다. 고구려 살수대첩에서 수나라를 크게 격파한 을지문덕 장군의 성을 따온 것이다.
한국전쟁 중에는 군수물자를 제조하는 공구상가들이 을지로와 청계천에 자리잡게 되며, 휴전 이후에는 도심 재건에 필요한 건축자재상들이 집적하게 된다. 1950~1960년 섬유산업의 발전으로 미싱상가와 1960~1980년 인쇄업의 번성으로 인쇄골목이 형성되었다. 1980년대 업무용 빌딩들이 을지로 주변에 세워지면서 업무지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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